때가 되면 으레 등장하는 재난물의 행렬에서 ‘터널’은 신선하게 다가오는 작품. 대개 등장인물을 소개하다가 재난이 발생하며 하이라이트로 치닫는데 ‘터널’은 시작 5분도 안 돼 참사가 벌어진다. 돌더미 속, 찌그러진 자동차 안이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연기를 펼쳐야 했는데도 하정우는 외려 자유롭고 짜릿했다고 설명했다.
“즉흥 연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감독님의 주문을 받았어요. 기본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 외에 어떤 규칙과 약속에 얽매이지 않고 불쑥 튀어나오는 말들을 뱉을 수 있다는 자체가 짜릿했어요. 한 컷 한 컷 정확하게 계산하고 시나리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찍었던 ‘아가씨’를 거친 뒤라 거기에서 오는 자유로움 또한 굉장했죠.”
‘터널’이 또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 속 1분 1초가 절체절명인데도 하정우의 즉흥 연기가 겉돌지 않고 이야기에 쫀득하게 달라붙는다는 점이다. 어딘지 모르게 침착하고 낙관적이며, 능청스러울 정도로 재난 상황에 적응하려는 추임새가 자꾸 웃음을 유발하는 것. 어찌 보면 비현실적일 수도 있으나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역시 하정우의 연기다. 캐릭터를 애써 꾸미려 하지 않고 그 안에 들어가 실제 하정우의 모습을 드러냈다. 굳이 구분하자면 알 파치노식 연기라고 할까.
“진짜 현실이라면 패닉으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가만히 엎드려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영화로는 그런 걸 보고 싶어하지는 않잖아요. 영화적 재미를 느끼게 하며 관객을 끝까지 끌고 가기 위해 대놓고 웃기는 게 아니라 주인공에겐 고통스러운 상황이 보는 입장에선 웃음을 자아내는 식의 블랙 코미디를 촘촘히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너무 말이 안 되게 릴랙스한 모습이면 설득력이 없으니까 고통은 잠시, 재미는 좀 더 길게, 그 사이의 비율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하정우는 감독 겸업 배우다. 연출자 입장에선 배우에게 여지를 주고 배우의 해석을 존중하는 편이라는 그는 세 번째 작품도 차근차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코리아 타운’(가제)이다. 한때 지하세계에 몸담았던 남자가 늘그막에 해외 교민 사회의 한인 회장이 되어 벌어지는 일을 그릴 예정이다. 이경영, 마동석, 조진웅에게 구두로 출연 약속을 받아 놓은 상태라며 웃는다.
“연출 면에 있어서는 코언 형제 스타일을 좋아해요. 차기작은 이야기의 재미가 완전하게 차오를 때까지 정교하게 준비하고 싶어요. 이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하려 하는데 한 2년 뒤에 선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허허허.”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