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유쾌한 영화 ‘4등’으로 진지한 고민을 던진 정지우 감독

즐겁고 유쾌한 영화 ‘4등’으로 진지한 고민을 던진 정지우 감독

홍지민 기자
홍지민 기자
입력 2016-04-11 14:31
수정 2016-04-1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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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영장에 레인을 그리면 경쟁만 남아요. 레인을 거두면 동네 목욕탕 같은 완전히 다른 환경이 되죠. 사회를 ‘통’으로 바꿀 수는 없겠지만 같은 공간이라도 레인을 조금만 거둬들여 더 행복해질 기회를 가질 수 없을까요?”

영화 감독 입장에서 산소 같은 느낌이었다는 인권위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정지우 감독은 차기작으로 용필름과 함께 ‘침묵’이라는 법정 휴먼 드라마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영화 감독 입장에서 산소 같은 느낌이었다는 인권위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정지우 감독은 차기작으로 용필름과 함께 ‘침묵’이라는 법정 휴먼 드라마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한물 간 수영 코치가 있다. 왕년에 한국 수영의 기대주였던 광수(박해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사고를 치던 자신을 주변에서 바로 잡아주지 않아 ‘이 모양 이 꼴’이 됐다고 여긴다. 수영을 즐기고 재능도 있는 초등학생 준호(유재상)가 있다. 대회에 나가면 늘 4등이다. 속이 타들어간 극성 엄마 정애(이항나)는 어렵사리 광수를 준호의 코치로 맺어준다. 준호가 첫 대회에서 ‘거의 1등’을 차지해 온가족이 기뻐하던 날, 동생 기호가 묻는다. “예전엔 안 맞아서 맨날 4등 했던거야, 형?”

 ‘해피엔드’(1999), ‘은교’(2012)의 정지우(48) 감독 작품이라면 ‘섹슈얼리티’와 맞닿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똬리를 트는 데 13일 개봉하는 ‘4등’은 거리가 한참 멀다. 수영이 소재라 ‘벗은 몸’이 많이 나오긴 하는데, 국가인권위원회의 12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엔 19금 인권 영화를 시도해보면 어떨까 농담을 주고 받았다며 개구진 미소를 짓는 정 감독은, 제안을 받은 여러 주제 중 스포츠 인권을 선택해 교육의 문제, 폭력의 문제까지 확장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수영 종목을 고른 것은 프랑스 그래픽노블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의 ‘염소의 맛’을 접한 뒤 ‘물 속의 사람’을 다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이 나오지 않아 물 속에서 우는 수영 선수’라는 한 문장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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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감독
정지우 감독
 “고등학교 1학년 남자 아이를 둔 아빠로서 제가 가지고 있는 불안을 고백하고 위안을 얻고 싶기도 했죠. 아이 교육 문제는 무엇이 정답인지 잘 모르겠어요. 영화를 만들며 느낀 건데,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른다면 아이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한 시간을 주고, 실패를 경험하는 근육을 만들어주는 게 가장 바람직한 것 같아요.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원망하면 어떻게 하냐는 무시무시한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말이죠.”

주제는 심오한데 영화는 재미있고 가볍고 유쾌하다. 제작비가 6억원에 불과하지만 수중 장면을 비롯해 궁핍하게 보이는 구석도 없다. 국내 영화 시장에서 보기 드물 게 잘 만들어진 가족 영화로 보일 뿐이라는 이야기에 정 감독은 반색했다. “인권 영화 보러 왔으니 자세를 바르게 하라는 식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관객을 벌 세우지 않으려고 고민이 많았죠. 진지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하면 더 많은 고민 기회를 주는 거 잖아요. 실제 만들어진 수준을 보면 고예산 독립영화에요. 고맙게도 배우와 스태프들이 노무 투자 형식으로 참여해 제작비를 낮출 수 있죠. 수익이 나는 만큼 나눠 갖는 방식이라 결과가 좋았으면 합니다.”

학원 스포츠 인권을 다룬 영화 ‘4등’의 한 장면. 프레인글로벌 제공
학원 스포츠 인권을 다룬 영화 ‘4등’의 한 장면. 프레인글로벌 제공
 체벌 장면이 곧잘 등장하는 데 그중 마음이 덜컥 내려 앉는 대목이 있다. 폭력이 준호와 기호 사이까지 전이되는 것이다. 굳이 넣지 않아도 될까 싶었는데 정 감독은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라며 눈을 부릅떴다. “이 세상에 결코 맞을 짓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때리면 안되지, 그런데 맞을 짓을 했잖아’라는 식으로 생각하곤 해요. 선생님 회초리 때문에 인생을 고쳤다거나, 지금은 아프지만 나중엔 고마워하게 될 거라는 식이죠. 처음엔 정당해보여도 몸이 기억하는 폭력이 다음 단계, 그 다음 단계로 옮겨가다보면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행사되기 마련이에요. 어느 샌가 가해자와 피해가가 한 몸에 있게 되죠.”

 정 감독은 더 직접적이고 정치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다고 했다. 큰 마음 먹고 시작했다가 중간에 상업영화 물타기를 두 세 번 거치며 죽도 밥도 아닌 작품은 만들기 싫었는 데 인권위 프로젝트는 애매하게 봉합해야 할 일이 없어 흔쾌히,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기존의 상업영화 제작 틀에서 만들려고 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일단 4등이라는 제목부터 절대 허락되지 않겠죠? 아이가 혼자 대회에 나가는 엔딩도 없었을 거에요. 상업영화라면 용서할 수 없는 결론이에요. 엄마가 몰래 한켠에서 지켜본다거나 뒤늦게 코치가 뛰어 오겠죠. 조금 더 심하게는 병에 걸린 코치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아이의 모습을 병실에서 TV 중계로 지켜보며 숨을 거두는 식으로 이야기가 바뀔 수도 있어요. 제작 자체가 힘들 수도 있겠죠. 일단 흥행력이 있는 아역 배우가 없어 아이가 주인공이 되기 힘들어요. 악다구니 엄마 역할도 30대 중후반 톱스타는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요?”

 글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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