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는 6대 본드인 다니엘 크레이그가 처음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은 ‘카지노 로얄’(2006)을 기점으로 과거 내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리부트)하는, 사실상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며 부활했다.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이 1953년 처음 내놓은 007 소설의 첫 작품 제목이 바로 카지노 로얄. 때문에 영화 팬, 특히 007 팬들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대목은 과거와 현재의 절묘한 조화다. 본드의 상관인 M은 리부트 시리즈에서 여배우인 주디 덴치가 맡아 여성 캐릭터가 됐다가 전작부터 랄프 파인즈가 바통을 이어받으며 다시 남성 캐릭터가 됐다. 머니페니도 백인 여성에서 흑인 여성으로 바뀌었고, 현장 요원이었다가 사무직을 지원해 M의 비서를 맡는 식으로 재해석된다. 첨단 무기를 제공하는 Q도 본드를 구박하는 신세대 캐릭터로 변화한다.
이번 ‘스펙터’는 한발 더 나아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007의 과거로 승부수를 띄운다. 전작에서 어린 시절을 맛보기로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과거 시리즈 중 가장 악명 높은 조직으로 꼽히는 스펙터를 무려 44년 만에 다시 등장시키고 이를 본드의 과거와 얽히고설키게 만든다.
스펙터는 ‘살인번호’(1962)를 시작으로 ‘위기일발’(1963),‘썬더볼 작전’(1965), ‘두 번 산다’(1967), ‘여왕 폐하 대작전’(1969),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에 나온다. 007 하면 떠오르는 설원 추격 장면이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게 더욱 스펙터클 하게 재현되고, 향수를 자극하는 무기가 장착된 본드카와 과거 로저 무어 시절 중간 보스급 악당인 조스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캐릭터가 나오기도 한다. 24대 본드걸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에서 열연한 레아 세이두가 맡았다.
하지만 ‘스펙터’가 국내에서도 잭팟을 터뜨릴지는 미지수. 국내 시장에선 이름값에 견줘 이른바 ‘대박’ 시리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근 성적을 살펴보면 ‘카지노 로얄’이 101만명, ‘퀀텀 오브 솔러스’가 220만명이었고, 역대 최고 흥행작이라는 ‘스카이폴’도 237만명에 그쳤다.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으로 한껏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를 만족시키기에는 아쉬운 대목도 있다. 무엇보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맞서온 악당들의 ‘끝판왕’ 격으로 크리스토프 왈츠가 등장하지만 오히려 전작에 나온 하비에르 바르뎀의 존재감보다 못하다. 영미권 5개국 정보협력체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를 연상케 하는 ‘나인 아이즈’를 등장시켜 무분별한 개인 정보 감시 문제도 곁들이지만 기시감이 짙다. 영화 팬들에게 여신으로 군림했던 모니카 벨루치도 잠깐 등장하는데 시간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15세 이상 관람가.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