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인재에 시달리는 석굴암/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 연구원장

[기고] 인재에 시달리는 석굴암/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 연구원장

입력 2014-12-17 00:00
수정 2014-12-17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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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 연구원장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 연구원장
우리는 석굴암의 건축과 조각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주변 환경, 즉 가까이는 석굴암 주변의 풍수, 더 폭넓게는 토함산, 그리고 동해 바다를 모두 포함해 석굴암이라 인식해야 한다. 석굴암 앞에서 맞이하는 토함산 일출의 눈부시게 장엄한 광경은 석굴암 본존과 무관하지 않다. 석굴암은 왼쪽에 길게 뻗은 우람한 줄기인 청룡, 오른쪽에 얌전하고 짧은 줄기인 백호, 뒤에는 둥근 산봉우리인 현무, 앞에는 낮은 산들이 연이어 있고 그 너머에는 망망한 동해바다가 펼쳐지고 있는 등 사신(四神)을 주변에 배치한 가운데, 용이 호흡하는 자리인 용혈(龍穴) 자리에 있다.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이므로 석굴암(石窟庵)으로 부르면 암자의 성격으로 바꾸어 품격을 폄하한 셈이 된다. 그러니 원래 이름인 석불사로 불러야 한다. 석굴암이라 부르면 현재 석굴암의 석조 구조만 지칭할 뿐이다. 사람들이 석불사라고 하는 산을 포함한 가람의 규모를 잊을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석불사 금당 바로 앞에는 석등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가람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로 석가여래의 다른 모습이다. ‘금당과 석등과 탑’은 가람 형성의 가장 중요한 세 요소다. 그런데 웬일인지 석탑은 청룡의 줄기가 거의 끝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용이 우주의 기운을 호흡하는, 즉 그 기운을 내고 머금는 토함산(吐含山)의 이름이 생겼다. 바로 그 용혈 자리인 신령스러운 자리에 금당, 즉 석굴 모양 금당과 석등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숨 자리인 금당을 학자들의 오판으로 이중의 전실(前室)로 가두고 궁륭 위를 흙으로 덮은 지 오래고, 마침내 석등마저 두꺼운 콘크리트로 막고 있으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금당 앞에 축대를 만들어 마련한 넓은 철근 콘크리트 광장은 얼마 전에 의도적으로 과대한 전실 공사를 빙자해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큰 공사를 문화재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경주시청이 발주하고 문화재청이 감독했으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까닭이나 알겠는가.

석불사는 인도의 마하보디 사원과 같은 성격의 사원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정각을 이룬 곳이 바로 마하보디(위대한 깨달음·즉 大覺 혹은 正覺) 사원 자리로 그곳의 석가여래를 본뜬 것이다. 즉 당나라 현장 법사가 그곳을 순례했을 때 그가 본 그곳 불상의 크기를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기록해 두었는데, 석불사 본존의 크기를 요즘 곡척(曲尺)으로 재서 당척(唐尺)으로 환산한 건축학자가 일본의 측량 기사인 요네다 미요지였다. 필자가 그 수치가 어딘가에 근거했으리라는 예감을 가지고 추적해 본 결과 현장이 기록해 놓은 치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알았다. 즉 그 석불사 자리에서 여래가 정각을 이룬 셈이어서 석불사의 본존 석가여래의 조각이 세계의 으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앞의 석등에서 진리의 빛이 발하는 것이다.

석불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숱한 전란에도 조금도 적의 손길이 안 간, 자연적 변화만을 겪은 유일한 불교 사원이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사원이다. 한데 이처럼 크게 훼손했으니 여래여!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2014-12-1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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