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핍과 청년 핍을 통해 인간 탐욕 냉철하게 비판
“하나, 둘, 셋, 넷…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 무대 오른편에서 한 청년이 말끔한 정장을 입은 신사와 손을 맞잡고 춤을 연습한다. 엉거주춤 스텝을 옮기던 청년은 실수로 신사의 발을 밟고 핀잔을 듣는다. 홀연 무대 왼편에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을 한 소년이 나타난다. 예쁜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허리를 팔로 감싼 소년은 청년이 그랬듯 스텝을 옮기다 소녀의 발을 밟는다. 어색한 걸음, 긴장한 표정은 소년이나 청년이나 변한 게 없다. 하지만 그가 겪는 혼란의 근원은 달라졌다. 소년은 눈앞의 소녀를 향한 설렘 때문에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청년이 고개를 숙이는 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불편함 탓이다.극의 곳곳에서 소년 핍과 청년 핍은 시공을 초월해 마주한다. 이 같은 전개 방식은 방대한 원작을 효과적으로 압축할 뿐 아니라, 삶 속에서 펼쳐지는 선택과 방황, 성찰과 깨달음이라는 원작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낸다. 가난한 대장간 견습생이지만 순수하고 정이 많았던 소년 핍과, 막대한 유산이 자신에게 떨어질 것만 기다리며 흥청망청 세월을 허비하는 청년 핍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서로를 바라본다. 때로는 과거를 추억하고, 때로는 선택을 후회하는 두 핍의 표정이 대비되며 순수한 인간이 돈과 권위, 허례허식에 물들며 타락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원작의 어둡고 비관적인 정조에는 따뜻함이 더해졌다. 핍이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의 품에 안기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냉철하게 꼬집지만 결국은 인간적인 정(情)으로 감싸안으며 위로의 메시지를 건넨다. 오는 28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 1644-2003.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2014-12-1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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