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분쟁의 씨앗 ‘알아크사 사원’
지난 8월 말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싸움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지 불과 석 달 만에 가자지구에 다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알아크사 사원 문제가 깔려 있다. 지난달 29일 이스라엘 극우파 예후다 글리크 암살 미수 사건이 발단이 됐다.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스라엘이 알아크사 사원을 폐쇄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즉각 봉기했다. 지난 5일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승합차를 몰고 경전철 정류장으로 돌진해 1명이 숨졌고, 10일에는 서안지구 정착촌에서 팔레스타인인이 휘두른 흉기에 여성 1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어 18일에는 서예루살렘 하르노프 지역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 팔레스타인 청년 2명이 난입, 권총을 쏘고 도끼를 휘두르면서 유대교 랍비 4명이 사망했다. 이러다 ‘3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반면 무슬림에게 이 지역은 하람 알샤리프라고 불린다. 우리말로 풀자면 ‘숭고한 안식처’ 정도 된다. 이슬람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멀리 있는 사원이라는 뜻의 알아크사 사원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무함마드의 탄생지 메카, 무함마드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 3대 성지로 꼽힌다.
양측의 입씨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무슬림은 이스라엘 주장이 억지라고 본다. 몇 번 파괴를 겪다 보니 3차 성전의 위치는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는데 무조건 지금의 위치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를 찾는다고 그렇게 들쑤셨는데 아직 관련 유물 하나 나오지 않은 것이 그 증거라는 주장이다. ‘통곡의 벽’에 대해서도 “유대인조차 20세기 초까지 아무 관심 없었던 벽이었는데 갑자기 신성시한다”고 주장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같은 곳에서는 아예 “성전산이란 표현 자체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통곡의 벽’도 그냥 ‘서쪽 벽’이라고만 부른다. 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메시아가 재림하는 순간 다시 들어설 성전의 자리를 절대 양보할 수는 없다. 무슬림들이 알아크사 사원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제대로 된 발굴 조사를 회피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만 캐내다 보니 큰 돌 하나를 찾으면 한쪽은 승천의 증거라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성전의 토대가 있었던 증거라고 주장하는 식의 공방전이 벌어진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확정되면서 동예루살렘은 아랍권에,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손에 넘어갔다. 요르단 서부 지역 일부를 이스라엘에 떼 주기로 한 유엔 결의를 인정할 수 없었던 팔레스타인은 곧 전쟁에 돌입했으나 패배했다. 더 큰 결정타도 있었다. 흔히 6일전쟁으로 알려진 1967년 3차 중동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영역을 대폭 확대했고 동예루살렘도 장악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알아크사 사원 자체가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영국 텔레그래프지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일반 신도들이 최고로 신성한 장소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대교 계율에 따라 일반 신도들이 기도하거나 출입하는 것이 엄격하게 통제됐다”고 설명했다. 사안의 민감성을 이스라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나치게 강경한 모습을 스스로 자제하기도 했다 .
이 불안한 균형은 성지 회복을 갈망하는 이스라엘 우익세력에 의해 1990년대 들어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1990년 일부 과격파가 제3성전의 주춧돌을 놓겠다는 운동을 벌이면서 본격적인 논란이 시작됐고 1990년대 말쯤 이스라엘 극우운동가들이 금기를 깨고 알아크사 사원을 서서히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1967년 이후 사실상 알아크사 사원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들이 점차 누적되면서 일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알자지라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터닝 포인트는 2008년”이라고 지적했다. 일군의 강경파 랍비들이 일반 신도들의 성전산 참배를 금지한 전통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도 알아크사 사원에 들어가 기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일부는 아예 알아크사 사원을 무너뜨리고 제3성전을 재건하자는 주장까지 내놨다. 지난달 강경파 랍비 예후다 글리크가 팔레스타인 청년에게 암살당할 뻔했던 사건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 극한적 대립은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 성전산을 정말 깊이 믿는 이스라엘 전문가들 사이에선 성전산 터와 알아크사 사원은 무관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들의 목소리가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은 그간 서로가 쌓아 온 불신 때문이다. 1967년 전쟁 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유엔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했던 국제사회는 당연히 이를 불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안보상 위협을 이유로 원상 복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착촌까지 건설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번 달에만 동예루살렘에 정착촌 500채를 건설하는 데 이어 200채 추가 건설을 결정했다. 평화와 공존보다는 야금야금 영역을 넓혀 가겠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국제적 비난을 사고 있는 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들어 스웨덴, 스페인, 영국, 아일랜드 등 유럽 국가들의 의회에서 잇달아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결의안이 통과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평화와 공존 대신 영토를 탐한다면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이자크 라이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 쪽에서 보자면 헤브론의 경험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헤브론은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 손에 들어갔다 1997년 협상 끝에 다시 팔레스타인 쪽으로 넘어간 지역이다. 그런데 1967년만 해도 인구의 5%에 불과하던 유대인이 1997년에는 50%를 차지하게 됐다. 처음엔 허름한 예배당을 지어 놓고 기도만 하겠다더니 이렇게 몰려들기 시작한 이들이 정착민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힘깨나 쓴다는 국가들이 한가롭게 결의안이나 통과시키고 있을 동안 이스라엘이 정착민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만 거주하던 동예루살렘도 헤브론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이런 불신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이미 전례가 있다. 이스라엘 총리를 지낸 아리엘 샤론이 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2000년 9월 28일 알아크사 사원 방문을 강행했다. 스스로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러 왔다”고 주장했으나 1000명의 무장병력이 그를 경호해야 했고, 신성한 사원에는 돌멩이와 고무총탄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5000여명의 사망자를 기록한 2차 인티파다가 시작됐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2014-11-25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