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박태환과 하기노/김민희 도쿄특파원

[특파원 칼럼] 박태환과 하기노/김민희 도쿄특파원

입력 2014-09-27 00:00
수정 2014-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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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도쿄 특파원
김민희 도쿄 특파원
체육기자 시절 박태환의 눈물을 본 적이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자유형 400m 예선의 실격 소동에도 불구하고 은메달을 딴 그와 믹스드존에서 얘기를 나눌 때였다. 특유의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하던 박태환은 점점 눈이 벌개지더니 기어이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 지옥과 천국을 오갔던 하루였으리라. “인터뷰 내일 하면 안 돼요? 죄송해요”라면서 도망치듯 돌아서는 박태환의 뒷모습을 보며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졌었다.

지난 23일 저녁, 일본 TV 중계로 인천아시안게임 자유형 400m 결승을 봤다. 이곳에서는 박태환을 잘 비춰주지 않아 경기 후 “죄송하다”고 말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기사를 읽으면서 2년 전 그가 흘린 눈물이 떠올라 다시 한 번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의 이름을 딴 수영장에서, 온 국민이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당연히 1등을 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제아무리 오랜 기간 단련된 박태환이라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터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일본 TV에서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하기노 고스케의 모습을 오랫동안 비췄다. 요즘 그는 단연코 일본의 영웅이다. TV나 신문 모두 그에 대한 기사로 넘쳐난다. 일본의 수영 영웅 기타지마 고스케 이후 12년 만에 고교생 신분으로 올림픽 국가대표에 발탁되고, 런던올림픽에서 자신의 롤모델인 마이클 펠프스를 제치고 동메달을 따며 56년 만에 고교생 메달리스트로 등극했으며, 지난해 일본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5관왕을 차지한 천재 선수. TV에서 초등학교 시절 대회에 참가한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신체조건이랄 것도 없이 깡마른 소년이 물에 뛰어들자마자 다른 선수를 압도하는 힘으로 두 배는 멀리 헤엄치고 있는 것이었다.

천재 소년이 영웅으로 진화한다는 레퍼토리는 박태환과 하기노 고스케 모두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박태환은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 영웅인 반면 하기노는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의 수영 인프라를 비교하는 것은 이제 입이 아프다. 일본에서는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수영장이 있고, 학교에서도 특별활동으로 수영을 많이 하기 때문에 아마추어들이 차고 넘친다. 하기노는 이렇게 기반이 탄탄한 일본의 수영 인재육성 시스템 안에서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기량을 키워왔다.

일본 언론들도 수영의 ‘황금 세대’라고 부를 정도로 1994년생 인재들이 많다. 세토 다이야, 야마구치 아키히로 등 라이벌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 한국은 어떤가. 박태환과 함께 자웅을 겨룰 라이벌은커녕 박태환의 뒤를 이을 유망주는 기르고 있는 것인지조차도 잘 모르겠다.

한국은 시스템보다는 영웅 스토리를 좋아한다. 정치계나 경제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TV 드라마에서도 갑자기 출몰해 난세를 평정하는 영웅에 열광한다. 그러나 영웅이 쇠락하면 가차없이 비난을 퍼붓는 것도 한국의 특징 중 하나일 터다. 그렇게 한국에서 몇몇 영웅이 나고 지는 동안 한국의 시스템은 나아진 것이 무엇인가. TV 화면 너머로 하기노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안타까움이 더욱 사무쳤다. 일본에 배울 점이 있다면, 오랜 기간 끈기있게 기본을 닦은 뒤에 성과를 내는 시스템의 힘일 것이다. 이제 영웅의 눈물은 그만 봤으면 좋겠다.

haru@seoul.co.kr
2014-09-2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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