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제임스 스콧 지음/김훈 옮김/여름언덕/246쪽/1만 5000원
아나키즘. 모든 제도화된 정치조직, 또는 권력, 사회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다. 우리에게는 일본을 거쳐 ‘무정부주의’로 번역 소개돼 왔다. 그런 탓인지 무질서한 테러와 폭동, 혼동, 혼란 등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아나키즘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질서한 민주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쓴 ‘아나키’(키잡이 없는 배)를 어원으로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1865)이 처음으로 아나키즘이라는 말을 쓰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칭했다. 그는 아나키즘의 정수로서 위계와 국가 지배가 없는 상태에서의 자발적이고 호혜적인 협동을 강조했다. 아나키즘 이론은 그의 제자인 러시아의 미하일 바쿠닌과 표트르 크로폿킨에 이르러 더욱 체계적으로 심화됐다. 크로폿킨이 쓴 ‘상호부조 진화론’이 초기 대표적인 저서다.
하지만 정작 역사 속에서 철학과 사상으로서 제 대접을 못 받는 것 또한 현실이다. 한때 사회주의 운동의 동지적 연대 관계였지만 프루동이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집중제를 강하게 비판했고, 마르크스 역시 아나키즘의 오류에 대해 집중 성토하며 균열이 생긴 데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는 아나키즘의 제 몫 찾아 주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체제에 반하는 불온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복잡하고 고답적인 철학 사상 소개도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맥주 한잔 놓고 마주 앉아 얘기하듯 편안하게, 때로는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듯 열정적으로, 또 때로는 노회한 칼럼니스트처럼 우스개 섞어 조롱하면서 글을 풀어 가는 에세이에 가깝다.
신호등, 도로명 주소, 학교 교육 시스템, 농작물 재배 방식 등 우리네 크고 작은 현실 속에서 국가와 자본이 자신들의 지배 편의를 위해 얼마나 촘촘히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지 아나키즘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또 그러한 질서에 맞서기 위한 ‘아나키즘적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미국 예일대 교수인 저자 제임스 스콧은 ‘아나키스트의 안경’을 끼고 대중운동, 혁명, 정치, 국가를 바라볼 경우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전한다. 지금까지 다른 시각으로 봤을 때 보지 못했던 통찰을 확인할 수 있고 아나키즘에 관해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열망도 볼 수 있으며 정치 활동에서 아나키즘의 원칙들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현상 또한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이며 협조적인 공동체적 질서다.
그는 자신이 독일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하나의 예를 든다. 사방 몇 ㎞ 어디에도 자동차 한 대 다니지 않는 시골길 횡단보도 붉은 신호등 앞에서 인내심 있게 초록불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상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관행을 읽는다. 그것은 시민적 책임 의식으로 포장된, 하지만 기실 현재 통용되는 법규명령을 어김으로써 받게 될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네 독자적인 판단을 정지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호등이란 것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근본 목적임에도 일상 속의 사소한 탈주조차 익숙하지 않게 됐음을 뜻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드라흐턴에서 실시한 신호등 철거 실험에서 신호등, 즉 강제적 조정 명령이 없을 경우 운전자, 보행자 등의 독자적 판단 능력이 더 좋아져 사고가 줄어들었다고 소개한다. 역설적이지만 규정을 지킬 경우 혼란이 더 커질 수 있음도 함께 강조한다. 대표적인 예로 파리 택시운전사들의 ‘준법투쟁’이다. 도로교통법에 따른 모든 규정을 철저히 지키기 시작하자 파리 교통이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던 사례다.
스콧은 스스로 ‘아나키즘적 세계관을 결여한 상태’로 규정하면서도 아나키즘을 예찬한다. 또 그것이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과도 다름을 거듭 강조한다. 비공식적인 협동과 협조, 위계 없는 호혜적 상호 관계는 대다수 사람이 흔히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며, 그것이 국가의 법이나 제도와 적대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즉 아나키즘적 상호 관계의 경험은 우리 곁에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규격화된 친절함과 자본의 상품을 판매하는 대형마트 틈바구니에 있는 동네 구멍가게, 채소가게가 동네 사랑방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동네 가게에서 파는 물건의 가격이 대형마트보다 약간 비쌀지 모르지만 비공식적으로 공공 안전, 주민 복지 등을 제공하는 공동체 역할을 맡고 있다는 얘기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아나키즘. 모든 제도화된 정치조직, 또는 권력, 사회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다. 우리에게는 일본을 거쳐 ‘무정부주의’로 번역 소개돼 왔다. 그런 탓인지 무질서한 테러와 폭동, 혼동, 혼란 등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아나키즘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질서한 민주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쓴 ‘아나키’(키잡이 없는 배)를 어원으로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1865)이 처음으로 아나키즘이라는 말을 쓰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칭했다. 그는 아나키즘의 정수로서 위계와 국가 지배가 없는 상태에서의 자발적이고 호혜적인 협동을 강조했다. 아나키즘 이론은 그의 제자인 러시아의 미하일 바쿠닌과 표트르 크로폿킨에 이르러 더욱 체계적으로 심화됐다. 크로폿킨이 쓴 ‘상호부조 진화론’이 초기 대표적인 저서다.
하지만 정작 역사 속에서 철학과 사상으로서 제 대접을 못 받는 것 또한 현실이다. 한때 사회주의 운동의 동지적 연대 관계였지만 프루동이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집중제를 강하게 비판했고, 마르크스 역시 아나키즘의 오류에 대해 집중 성토하며 균열이 생긴 데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는 아나키즘의 제 몫 찾아 주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체제에 반하는 불온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복잡하고 고답적인 철학 사상 소개도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맥주 한잔 놓고 마주 앉아 얘기하듯 편안하게, 때로는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듯 열정적으로, 또 때로는 노회한 칼럼니스트처럼 우스개 섞어 조롱하면서 글을 풀어 가는 에세이에 가깝다.
신호등, 도로명 주소, 학교 교육 시스템, 농작물 재배 방식 등 우리네 크고 작은 현실 속에서 국가와 자본이 자신들의 지배 편의를 위해 얼마나 촘촘히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지 아나키즘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또 그러한 질서에 맞서기 위한 ‘아나키즘적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미국 예일대 교수인 저자 제임스 스콧은 ‘아나키스트의 안경’을 끼고 대중운동, 혁명, 정치, 국가를 바라볼 경우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전한다. 지금까지 다른 시각으로 봤을 때 보지 못했던 통찰을 확인할 수 있고 아나키즘에 관해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열망도 볼 수 있으며 정치 활동에서 아나키즘의 원칙들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현상 또한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이며 협조적인 공동체적 질서다.
그는 자신이 독일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하나의 예를 든다. 사방 몇 ㎞ 어디에도 자동차 한 대 다니지 않는 시골길 횡단보도 붉은 신호등 앞에서 인내심 있게 초록불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상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관행을 읽는다. 그것은 시민적 책임 의식으로 포장된, 하지만 기실 현재 통용되는 법규명령을 어김으로써 받게 될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네 독자적인 판단을 정지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호등이란 것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근본 목적임에도 일상 속의 사소한 탈주조차 익숙하지 않게 됐음을 뜻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드라흐턴에서 실시한 신호등 철거 실험에서 신호등, 즉 강제적 조정 명령이 없을 경우 운전자, 보행자 등의 독자적 판단 능력이 더 좋아져 사고가 줄어들었다고 소개한다. 역설적이지만 규정을 지킬 경우 혼란이 더 커질 수 있음도 함께 강조한다. 대표적인 예로 파리 택시운전사들의 ‘준법투쟁’이다. 도로교통법에 따른 모든 규정을 철저히 지키기 시작하자 파리 교통이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던 사례다.
스콧은 스스로 ‘아나키즘적 세계관을 결여한 상태’로 규정하면서도 아나키즘을 예찬한다. 또 그것이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과도 다름을 거듭 강조한다. 비공식적인 협동과 협조, 위계 없는 호혜적 상호 관계는 대다수 사람이 흔히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며, 그것이 국가의 법이나 제도와 적대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즉 아나키즘적 상호 관계의 경험은 우리 곁에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규격화된 친절함과 자본의 상품을 판매하는 대형마트 틈바구니에 있는 동네 구멍가게, 채소가게가 동네 사랑방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동네 가게에서 파는 물건의 가격이 대형마트보다 약간 비쌀지 모르지만 비공식적으로 공공 안전, 주민 복지 등을 제공하는 공동체 역할을 맡고 있다는 얘기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2014-09-2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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