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현직 총리까지 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며 최악으로 치닫던 한·일 갈등이 다른 현안들에 가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하시모토 도루 일본 오사카 시장은 지난달 21일 “위안부가 (일본)군에게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일본 우익이 자주 언급해 왔던 내용이고, 아베 신조 전 총리 발언의 연장선상의 표현이기에 대응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하시모토는 유력한 ‘차기 일본 총리감’으로 언급될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기에 그의 발언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일본군에게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한다면 ‘그렇다.’이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이미 결론 난 부분이다. 한국의 피해자 증언에서 일본군 경관의 관여 등이 확인되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인과 네덜란드인 여성들을 군인이 폭력적으로 끌고 간 사실을 기록한 공문서가 있다.
이 발언의 문제 핵심은 징집과정에서 군의 폭행·협박에 끌려갔다는 증거를 요구함으로써 징집뿐만 아니라 이송, 배치과정에 있었던 강제성 전체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위안부’를 징집하는 데 일본군의 직접 수행을 일반화하지는 않는다. 일상적으로는 일본군에 속하거나 명령 받은 ‘(준)군속’ 혹은 ‘군 종속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거의 전권을 가지고 다양한 강제적 방식으로 수행했다고 본다. 강제란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강제란 또한 군위안소 내 행위까지 적용되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제를 만든 것 자체가 범죄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정부는 미성년자 인신매매 금지를 위한 국제조약에 가입한 상태였다. 미성년 여성들의 국제적 성매매를 방지하기 위한 조약으로, 정부가 나서서 인신매매·유괴·협박 등 성매매를 목적으로 한 국외이송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다. 국내법 형법 제226조에서도 국외로 이송할 목적으로 사람을 매매하거나, 유괴 혹은 매매된 자를 국외 이송하는 것에 대해서도 금지하고 어길 경우 2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지에 있던 일본군이 조선총독부나 ‘조선군’에게 요청하여 다양한 불법적 방식으로 여성들을 동원하였음은 이미 당시 문서자료에서 확인되었다.
또 주목할 것은 1939년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인신매매에 대한 신문보도가 있었으나 조선총독부가 이들을 처벌하였다는 내용은 없다. 반면 전쟁상황이나 ‘위안부’제와 연관되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육해군형법으로 엄하게 처벌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일제의 주구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폐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도 1940년 이후에는 없었다. 이러한 엄혹한 사회 분위기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이었던 일본군의 필요라면 심지어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도 중지시킬 수 있었다. 그 강력한 일본군의 요구 중 하나가 바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인 동원방식은 주범인 일본군의 명령과 요구에 의해 종범인 대리인이 강제적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피해자 증언이 자료가 되지 못한다면 문서자료는 일본 측이 제시해야 한다. 패전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체계적으로 자료를 소각정리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중요한 자료들은 복수로 만들어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으므로 일본에 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에게 문서자료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일본의 법무성, 경찰청, 출입국 관련 자료, 군사우편국 등의 ‘위안부’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 공개하는 것이 순서이다.
앞으로 중요한 위치로 나아갈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러한 유사한 발언을 반복적으로 하지 말고 눈앞의 이익을 뛰어넘어 이젠 동아시아의 인권 수준을 높이는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강정숙 이대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
‘일본군에게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한다면 ‘그렇다.’이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이미 결론 난 부분이다. 한국의 피해자 증언에서 일본군 경관의 관여 등이 확인되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인과 네덜란드인 여성들을 군인이 폭력적으로 끌고 간 사실을 기록한 공문서가 있다.
이 발언의 문제 핵심은 징집과정에서 군의 폭행·협박에 끌려갔다는 증거를 요구함으로써 징집뿐만 아니라 이송, 배치과정에 있었던 강제성 전체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위안부’를 징집하는 데 일본군의 직접 수행을 일반화하지는 않는다. 일상적으로는 일본군에 속하거나 명령 받은 ‘(준)군속’ 혹은 ‘군 종속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거의 전권을 가지고 다양한 강제적 방식으로 수행했다고 본다. 강제란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강제란 또한 군위안소 내 행위까지 적용되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제를 만든 것 자체가 범죄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정부는 미성년자 인신매매 금지를 위한 국제조약에 가입한 상태였다. 미성년 여성들의 국제적 성매매를 방지하기 위한 조약으로, 정부가 나서서 인신매매·유괴·협박 등 성매매를 목적으로 한 국외이송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다. 국내법 형법 제226조에서도 국외로 이송할 목적으로 사람을 매매하거나, 유괴 혹은 매매된 자를 국외 이송하는 것에 대해서도 금지하고 어길 경우 2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지에 있던 일본군이 조선총독부나 ‘조선군’에게 요청하여 다양한 불법적 방식으로 여성들을 동원하였음은 이미 당시 문서자료에서 확인되었다.
또 주목할 것은 1939년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인신매매에 대한 신문보도가 있었으나 조선총독부가 이들을 처벌하였다는 내용은 없다. 반면 전쟁상황이나 ‘위안부’제와 연관되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육해군형법으로 엄하게 처벌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일제의 주구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폐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도 1940년 이후에는 없었다. 이러한 엄혹한 사회 분위기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이었던 일본군의 필요라면 심지어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도 중지시킬 수 있었다. 그 강력한 일본군의 요구 중 하나가 바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인 동원방식은 주범인 일본군의 명령과 요구에 의해 종범인 대리인이 강제적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피해자 증언이 자료가 되지 못한다면 문서자료는 일본 측이 제시해야 한다. 패전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체계적으로 자료를 소각정리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중요한 자료들은 복수로 만들어 일본으로 보내기도 했으므로 일본에 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에게 문서자료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일본의 법무성, 경찰청, 출입국 관련 자료, 군사우편국 등의 ‘위안부’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 공개하는 것이 순서이다.
앞으로 중요한 위치로 나아갈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러한 유사한 발언을 반복적으로 하지 말고 눈앞의 이익을 뛰어넘어 이젠 동아시아의 인권 수준을 높이는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2012-09-0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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