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에 만난 사람] 재능을 나누는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이 달에 만난 사람] 재능을 나누는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입력 2012-07-29 00:00
수정 2012-07-2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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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도 나눔도, 인연을 타고

한글 디자인으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은 인연을 따라 흘러가는 사람이다. 언제나 한국적인 소재로 디자인을 하는 그가 지난해에는 산수화를 선택한 것도 물길처럼 자연스러웠던 인연 때문이었다. “세상을 떠난 동생을 보러 설악산에 갔는데, 그때 눈 쌓인 설악을 10여 년 만에 보았던 것 같아요.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가 산수화를 떠올린 거예요.” 설악산에서 만난 산수와 단청은 그가 지은 옷자락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그의 나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애우와 다문화가정, 위탁가정의 아이들, 형편이 어려운 고등학생 등과 재능 또는 재산을 나누어온 이상봉은 그때마다 인연의 인도를 받았다. “방송 프로그램 때문에 처음으로 제가 나온 고등학교에 갔어요. 후배들인 건데, 어머니하고 고시원에 사는 아이가 있더라고요. 어려운 친구들이 꿈을 접고 아르바이트하는 걸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장학금을 마련하기로 했어요. 첫 번째 장학생하고는 지금도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용기를 주는 사이에요.” 착해지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만남을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이 편안했다.

사랑도 짐이 되기에

이상봉이 세상과 주로 나누는 것은 그의 재능이다. 30년 전에 명동 제일백화점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부티크를 열었던 이상봉은 2002년 패션의 수도인 파리에 진출했고 지금까지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참가하고 있다. 팝 가수 레이디 가가와 영화배우 줄리엣 비노쉬, 피겨 선수 김연아 등이 그의 옷을 입은 스타들이다. 이상봉은 그런 재능을 기꺼운 마음으로 다른 이들과 나눈다. 하지만 그건 그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사랑도 짐이 되더라고요. 한글 디자인으로 너무 많은 사랑을 받으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돌려줘야 하나 싶었어요. 그 무렵 몸이 아팠던 것도 이유였고요. 나는 남보다 강하다고 믿었는데 몸이 아프니까 너무 약한 사람이었던 거예요. 외로움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들 깜짝 놀랐어요. 생전 안 하던 짓을 한다고(웃음). 그때 병원에서 뭔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제가 종교는 없지만, 만약 그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온다면 이제 나누고 살리라, 마음 먹었어요.”

5월 24일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안녕, 하세요>도 그의 재능과 만난 적이 있다. <안녕, 하세요>는 시각 장애 아이들이 다니는 인천 혜광학교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주연’ 중의 한 명은 교사 이상봉이다. 동명이인인 것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상봉 교사와 만난 이상봉 디자이너는 아이들에게 티셔츠를 만들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퀴즈 프로그램 <1대 100>에 나갔다. “진짜, 상금만 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능 프로에 나갔는데, 떨어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제 돈으로 티셔츠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영화 개봉을 앞두고는 다시 한 번 디자인을 기증했다. “내가 읽을 수 없는 점자책을 읽어주는 아이들이에요. 비장애인이 잘나지 않은, 다른 세상도 존재한다는 걸 알려준 아이들이요. 처음 학교를 찾아갔을 때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았는데,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나에겐 항상 그 웃음이 남아 있어요.”

나눔으로 배우는 세상

이상봉은 자신의 나눔이 대단하다고도, 그렇다고 아주 쉬운 일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넘치는 것을 덜어낼 뿐이다. “나는 희생은 못 해요. 희생이라는 건 진짜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다 주고 그러는 건데, 그건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하고는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나눔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물론 나도 난 왜 이렇게 능력이 부족할까, 우리 직원들은 어떻게 먹여 살리나, 허덕이는 사람이지만.”

때로 나눔은 그의 선생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 가정위탁 홍보대사가 됐어요. 제가 예전에 파리 가는 비행기를 타면 갓난아이들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거든요. 다 입양 가는 아기들. 그걸 잊고 살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세상을 배우고 입양을 생각하게 된 거예요.”

10대와 20대 시절 이상봉은 누구보다 꿈이 많은 사람이었다. 오페라 가수가, 배우가, 극작가가 되고 싶었고, 꿈 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 또한 꿈을 꾸기를 바란다. “꿈을 너무 많이 꾼다고 배부른 거 아니잖아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랬기에 그는 공부하고 싶어 하는 10대 소년과 다문화 가정의 아이에게, 장애에 상관하지 않고 미래를 보는 혜광학교 아이들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모른다.

지금 그의 마음에는 돌담이 있다. 산수화와 단청에 이어 돌담 디자인을 생각하고 있는 그는 무언가를 이어주는 것이기에 돌담이 마음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마음의 돌담이 뻗어나가 누군가의 꿈에 가닿곤 하나 보다.

글 김현정 기자 사진 한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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