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4)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4)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입력 2012-04-12 00:00
수정 2012-04-12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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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안 신통력 지닌 뱀이 마을 수호 ‘1200년의 전설’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나무들은 단지 아름답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자연의 무구함을 배우게 하고, 나무를 둘러싼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살이의 의미까지도 알게 한다.”고 했다. 평소에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건 곧 ‘진리를 배우는 일’이라고 강조하며 정원 일을 즐겼지만, 그에게 나무는 관상의 대상으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는 삶의 진리를 얻고자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서 참삶의 길을 찾고자 했다. 헤세의 이야기대로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오래된 나무에는 오래된 삶 속에서 배워야 할 삶의 진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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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동안 사람살이를 지킨 마을 당산목이자 수호목으로 살아남은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1200년 동안 사람살이를 지킨 마을 당산목이자 수호목으로 살아남은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마을 수호목에서 문화재로 재조명

“동네 하나 뒤집어 엎는 건 금방이죠. 집들이 부서지고, 여기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건 고작해야 4년밖에 안 됐지만, 이제 옛날 모습은 남은 게 거의 없어요.”

공공근로 작업으로 나무 주변 정비 작업에 나온 강현미(73) 할머니가 점심 도시락 보자기를 펼치며 이야기를 꺼냈다. 강 할머니의 이야기대로 마을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나무 옆으로 난 조붓한 골목길을 따라 낮은 지붕의 작은 집들이 이어져 있었다. 골목 안에서는 간간이 동네 조무래기들의 왁자한 목소리도 새어나왔다. 정겹게 느껴지던 그 마을은 그러나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이들이 뛰놀던 골목으로는 널따란 자동차 도로가 뚫렸고, 반듯한 도로 너머로 휑해진 넓은 터에는 이미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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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의 정성이 담긴 당산제의 흔적으로 남은 소박한 돌제단을 품은 은행나무 줄기.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 담긴 당산제의 흔적으로 남은 소박한 돌제단을 품은 은행나무 줄기.
“변하지 않은 건 나무밖에 없어요. 이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라고 하대요. 우린 맨날 봐서 뭐 그리 대단한 줄 모르지요. 그러다가도 나무 한 그루 보겠다고 관광버스까지 타고 우르르 몰려와서 사진 찍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에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돼요.”

강 할머니는 이 마을로 이사온 지 몇 해 되지 않지만, 그나마 마을 사정을 아는 축에 속한다. 이곳 하송리는 군청을 가까이한 영월군의 중심지여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들고남이 잦았던 곳인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의 택지 개발까지 이어져 옛사람보다는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하송리 은행나무는 마을이 처음 들어설 때부터 마을의 당산나무로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나무이지만, 이제는 이곳 사람들보다 오히려 외지에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기념물로 남았다.

●영월엄씨 시조인 당나라 파락사가 심어

나무가 처음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린 건 신라 때인 1200년 전이다. 당시 당나라의 현종이 새로 지은 악장(樂章)을 주변 나라에 알리는 임무를 띤 ‘파락사’(波使) 신분으로 신라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임무를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가려 했으나, 때마침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고,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릴 요량으로 이 지역에 머무르게 됐다.

난은 금세 평정되지 않았고, 영월 지역의 풍광을 좋아하게 된 그는 마침내 새 성씨(姓氏)인 영월엄씨를 일으키고, 이 마을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가 바로 당나라의 파락사 엄임의(嚴林義)였다. 당시 마을 위쪽의 솔숲이 매우 우거졌다는 이유에서 마을 이름은 소나무 아랫마을, 즉 하송리(下松里)가 됐다.

영월엄씨의 시조인 그는 사람이 모여 사는 아름다운 마을의 상징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그게 바로 천연기념물 제76호인 하송리 은행나무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게 서기 755년이니 이 나무는 무려 1200년을 넘게 살아온 셈이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 신범(辛汎·1823∼1879)도 이 은행나무를 찾아보고 남긴 시(詩)에서 “中有千年杏”, 즉 ‘마을 한가운데의 천년 된 은행나무’라고 표현했다. 150년 전에도 이미 이 나무가 1000년을 넘은 나무라는 걸 모두가 인정했다는 증거다.

1000년을 넘게 살아온 나무는 키를 29m까지 키웠다. 세월의 풍진에 나무의 원래 줄기는 썩어 문드러져 가운데가 텅빈 듯한 생김새이지만, 거개의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원줄기 곁에서 돋은 맹아(萌芽)가 더 우람하게 자랐다.

택지 개발로 마을 사람들이 흩어져야 했던 아쉬움 탓이었는지, 영월엄씨 후손들은 나무 앞에 영월엄씨 시조가 심은 나무라는 돌비석을 세웠다. 그 동안 사람들은 나무를 지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였을 것이다. 조상의 얼이 깃든 나무이니 당연한 노릇이다. 그리고 나무를 떠나면서 그들은 나무와 더불어 살았던 자신들의 삶을 비석 하나의 기록으로 남겼다.

●사람살이의 안녕을 지켜온 ‘큰나무’

한 그루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살았던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얽힌 여러 전설을 남겼다. 나무 안에 신통력을 가진 늙은 뱀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늙은 뱀은 근처에 다른 삿된 짐승은 다가서지 못하게 하지만, 사람살이만큼은 평화롭게 지켜주었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나무에 기어오르다 떨어져도 결코 다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나무에 기도를 올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전설을 통해 나무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며 이룬 평화로운 풍경을 엿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떠나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도 나무는 앞으로 다시 또 긴 세월을 이 자리에 지금처럼 융융하게 선 채로 사람과 나무가 더불어 살아갔던 평화로운 마을의 사람살이를 서리서리 풀어낼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주변 환경과 그 곁에서 이뤄가는 사람살이의 의미를 짚어준다는 헤세의 말을 다시 짚어보게 하는 이 땅의 큰 나무다.

글 사진 영월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강원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190-4번지. 중앙고속국도의 제천나들목으로 나가서 영월군 방면으로 간다. 국도 38호선을 이용해 영월군에 들어서면 남면 소재지를 지나면서 청령포 방면을 알리는 안내판을 자주 만나게 된다. 청령포에 가까이 가면 청령포교차로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영월군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공설운동장을 지나면서 나오는 군청사거리를 지나 300m쯤 가면 하송사거리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280m 가면 나무가 있다. 나무 옆에 자동차를 세울 공간이 있다.

2012-04-12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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