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김성중 지음 문학과지성 펴냄
집과 땅 사이의 틈이 점점 벌어지면서 허공이 생긴다. 그 허공 위로 계단이 놓이고, 그 안에서 살아남은 소녀는 점점 투명해지다가 결국 증발하고 만다. 모든 것이 허공으로 떠오른 뒤 투명하게 사라지는 세계. 하지만 일할 곳 없어도 소년의 성장판은 닫히지 않고, 아이 낳을 세계가 사라지는데도 소녀는 달거리를 거르지 않는다. 소녀는 이렇게 묻는다.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한국 문학계의 유망주로 꼽히는 소설가 김성중(36)의 첫 소설집 ‘개그맨’(문학과지성 펴냄) 가운데 ‘허공의 아이들’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무대는 환상적인 세계지만 소녀의 질문이 겨냥하고 있는 건 ‘88만원 세대’ ‘거마대학생’ 등이 널부러진 뼈아픈 현실이다.
책은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과 웹진문지문학상 등을 잇달아 수상한 김씨가 등단 이후 발표한 단편소설 9편을 묶은 것이다. 그 덕에 33세에 등단한 ‘중고 신인’의 작품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김씨의 문학적 사유는 흔히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표현된다. 쉽게 말해 평이한 일상 속에서 기이한 상상을 이끌어내길 즐긴다는 뜻이다. 책엔 이 같은 그의 성정이 잔뜩 녹아 있다. 몇 줄 읽다 보면 영화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 극장’ 혹은 미국의 영화감독 팀 버튼이 퍼뜩 떠오른다. 다만 팀 버튼이 다소 가볍고 컬트적인 상상을 즐긴다면, 김성중의 화법은 보다 내밀하고 인간적이다.
소설 행간엔 재기가 번뜩인다. 요즘 인기 개그맨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 대단한 앙팡테리블 나셨다, 그죠?”다.
표제작 ‘개그맨’은 고통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심연을 들춰낸다. 한 개그맨과 사랑했지만 다른 남자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한 후 14년간 ‘무탈하게’ 산 여자가 주인공이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여자는 옛 애인이었던 개그맨의 부고를 받고, 자신과 헤어진 뒤 그가 걸었던 삶의 족적을 뒤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처가 세밀하게 드러난다.
고전 ‘토끼전’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패러디해 상처와 치유에 관해 우화적으로 접근한 작품 ‘간’과 희망은 봉인되고 출구마저 막힌 악몽의 끝없는 순환을 보여 주는 ‘순환선’, 서로의 그림자가 바뀌면서 왜곡되고 전도된 그림자들로 혼돈의 도가니가 된 섬에서 벌어지는 초현실적인 사건들을 담고 있는 ‘그림자’, 모든 사람들이 탈모가 된 뒤 머리에 피는 꽃의 아름다움에 따라 사람의 우열이 결정되는 도시의 우울한 이야기를 담은 ‘머리에 꽃을’ 등도 만만찮은 내공을 담고 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2011-10-15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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