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43) 강원도 영월 법흥사 밤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43) 강원도 영월 법흥사 밤나무

입력 2011-08-25 00:00
수정 2011-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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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 바람결에 느릿느릿 200년 세월 우리의 인간사 닮았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세월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열매 맺는 나무도 세월 따라 몸피를 키우고 모양을 바꾼다. 당연한 노릇이다. 나무를 둘러싼 사람살이의 변화는 나무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사람살이에 길들여진 눈으로 나무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는 이유다. 결국 한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살아가는 나무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움직이지 않는 생명은 없다. 운동과 변화는 생명의 기본 원리다. 나무 곁을 흐르는 세월은 필경 나무의 변화를 가져온다.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나무의 작은 변화에 눈길을 돌리는 것은 우리 곁의 모든 생명을 지켜내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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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사를 부흥시킨 징효대사 보인탑비 위쪽에 서서 징효대사의 얼을 지켜온 법흥사 밤나무(왼쪽). 비탈에 서 있는 게 힘겹다는 듯 살짝 비스듬하게 선 법흥사 밤나무의 줄기.
법흥사를 부흥시킨 징효대사 보인탑비 위쪽에 서서 징효대사의 얼을 지켜온 법흥사 밤나무(왼쪽). 비탈에 서 있는 게 힘겹다는 듯 살짝 비스듬하게 선 법흥사 밤나무의 줄기.



●200년 제 몫 다해 열매는 부실… 꽃은 잘 피워

입추, 처서가 지나자 강원도 영월 법흥사의 극락전 지붕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가을 내음이 묻어나온다. 온 생명의 가을 채비가 뚜렷하다. 바람이 흐르다 머무르는 언덕 중간에는 한 그루의 오래된 밤나무가 결실의 계절을 준비한다.

법흥사 극락전 언덕의 밤나무가 세월을 희롱하는 듯 비스듬히 서서 스치는 바람을 품어 안았다. 야트막한 언덕의 곡선을 따라 살짝 비스듬하게 버티고 선 그의 모습에 여유와 풍요로움이 담겼다. 식물이 피우는 꽃 향기치고는 독특한 비린내의 유백색 밤꽃을 풍성하게 피웠던 밤나무다. 모든 나무들이 그렇듯 이제 열매를 맺을 차례다.

“늙은 밤나무라서 그런지, 열매는 실하지 않아요. 꽃이 하얗게 잘 피어나긴 해도 열매는 잘 안 열려요. 그나마 열리는 열매들은 아주 잘거나 속이 빈 게 많죠. 먹을 게 못 됩니다.”

종무소 앞의 찻집 ‘다향원’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스님은 아쉬움을 드러낸다.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들은 다른 나무들에 비해 비교적 수명이 짧은 편이다. 꽃이 화려한 나무들도 그렇다. 젊은 시절에 화려하게 부귀영화를 누린 탓이지 싶다.

“오래된 나무지만, 누가 심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특별히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도 없고요. 그저 보기에 좋은 나무이니 소중하게 여길 뿐이지요.”

법흥사 밤나무는 우리나라의 밤나무 가운데 손꼽히는 큰 나무 중 하나다. 내력이 온전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무의 나이는 200살쯤 된 것으로 짐작된다. 생식 능력은 이미 고갈됐지만, 긴 세월 동안 그가 맺었던 열매를 생각하면 한 그루의 나무가 이 땅에서 해야 할 몫은 이미 다 치러낸 셈이다.

●키 27m? 눈대중으론 15m… 안내판 부정확

나무가 서 있는 언덕 아래에는 보물 제612호인 징효대사 보인탑비와 부도가 놓여있다. 징효대사는 법흥사를 처음 세운 신라 때의 자장율사와 함께 이 절을 대표하는 고승이다.

나무와 비석과 부도 사이에는 언제나 손에 잡힐 듯한 묘한 적막감이 휘감아 돈다. 비석과 부도, 그리고 징효대사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 일부러 심은 듯한 짐작이 생뚱맞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 옆에는 오래된 법당, 극락전이 있다. 법흥사에서는 몇 해 전부터 극락전을 대웅전이라고 고쳐 부른다. ‘극락전’이라는 현판도 떼어냈다. 사람살이의 변화를 따라 절집에도 찾아오는 당연한 변화이지 싶다. 그러나 밤나무에서는 극락전일 때나 대웅전일 때나 별다른 변화를 찾아 볼 수 없다. 살아 있는 생명체인 이상 나무도 분명 키를 키웠을 것이고, 몸피를 늘렸을 텐데, 사람의 눈으로는 알아챌 수 없다.

“저게 밤나무 맞아요? 안내판에는 그렇게 써 있긴 한데, 꽤 크네요. 밤나무가 저만큼 크게 자랄 수 있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던 중년의 관광객이 한마디 던진다. 밤나무 앞에 세워놓은 보호수 안내판에는 나무의 줄기가 430㎝라고 돼 있다. 두 아름이 훨씬 넘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27m라고 된 나무의 키는 좀체 믿기 어렵다. 눈대중으로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15m 안팎이다. 그 정도만 해도 밤나무로서는 무척 큰 나무다.

살아 있는 이상 나무의 키나 둘레는 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거의 두 배 가까운 차이가 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보호수로 지정한 뒤에 벼락이나 태풍을 맞아 큰 가지가 부러지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나무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2001년 이후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아무래도 처음 측정에 문제가 있었지 싶다. 굳이 사람들에게 나무를 알리기 위해 세워둔 안내판이라면 보다 정확했으면 싶다.

●나무 곁으로 흐르는 사람 향기…

느린 변화를 안고 살아온 200살짜리 밤나무 앞으로 곱게 차려입은 노부부가 느릿느릿 다가온다. 중풍으로 몸의 한쪽을 못 쓰게 된 노인의 팔을 끌어안고 가만가만 걷는 노파의 걸음걸이가 조심스럽다.

힙겹게 걸음을 떼어놓는 노인에게 노파는 ‘적멸보궁까지는 못 올라간다니까요.’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굳이 언덕 길을 따라 적멸보궁까지 오르자고 조르는 중이다. 얼핏 봐도 불편한 노인의 몸으로 500m쯤 되는 비탈 길을 오르는 건 무리다.

그러나 노파가 졌다. 늙은 밤나무를 뒤로 하고 노부부는 언덕 길로 접어든다. 한 걸음 떼어놓고는, 멈춰 서서 한숨을 내쉰다. ‘거 보세요. 안 된다니까요.’라면서도 노파는 적멸보궁을 향해 노인을 이끈다. 노부부의 몸짓에 느릿느릿 쌓이는 세월이 향기롭다.

절집이 변하고, 나무가 변해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향기만큼은 끝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솔숲 사이로 바람 한 점이 건듯 불어온다. 바람따라 노인이 다시 한 걸음 떼어놓는다. 노부부를 지그시 바라보는 밤나무 줄기 위로 세월이 내려앉는다.

글 사진 영월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강원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 중앙고속국도의 신림나들목으로 나가서, 지방도로 88호선 영월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19㎞쯤 가면 주천면 소재지에 닿고, 여기에서 1㎞쯤 더 가면 법흥사 계곡으로 들어서는 갈림길이 나온다. 법흥사 쪽으로 좌회전하면 곧바로 주천강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800m쯤 간 뒤에 나오는 다리를 다시 건너서 좌회전하여 계곡 길을 따라 10㎞쯤 가면 법흥사다. 나무는 극락전 바로 옆 언덕 중간에 있다.
2011-08-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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