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秋史의 삶을 기억하는 새하얀 자태…백송의 침 묵은 역사가 되었다
한파 특보를 몰고온 동장군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 엄동, 눈을 잔뜩 품은 구름이 거센 바람 따라 휘몰아치는 설한이다. 엄동설한의 한적한 시골길은 정적에 휩싸였다.독야청청 푸른 소나무도 하릴없이 침묵에 들었다.
숱하게 겪어온 겨울의 기억을 나무는 수백개가 넘는 나이테로 줄기 안쪽에 깊숙이 쌓았다.
다시 하나의 나이테를 쌓으며 나무는 혹한의 계절을 흘려보내는 중이다. 추위로 얼어붙은 겨울 시골 길 위에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겼다.
나무에는 가느다란 떨림조차 없다. 나무의 속살에, 그리고 나무 앞에 놓인 겨울의 침묵이 견고하다.
나무가 겪어온 세월의 깊이만큼 깊고 먼 침묵이다.
추사 김정희가 고조부 김흥경의 묘 앞에 손수 심은 백송. 세개의 가지 가운데 두개를 잃었지만, 여전히 듬직한 자태로 추사의 삶을 증거하고 있다.
나무는 200여년 전인 1809년 추사 김정희 선생이 손수 중국에서 들여와 심고 애지중지 가꾼 백송이다. 백송은 소나무와 사촌 간인 나무이지만, 생김새가 유난스러워 눈에 잘 띈다. 줄기는 흰색 바탕에 밝은 회색의 얼룩이 신비롭게 어우러졌다. 그래서 백송이라고 부른다.
중국이 고향인 백송은 고향을 떠나서 자라는 생육 능력이 미약해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다. 자람이 더딜 뿐 아니라, 옮겨심기도 무척 까다롭다. 우리나라에 살아 있는 오래 된 백송은 중국을 오가던 사신이나 양반가의 선비들이 한 그루씩 얻어와 심어 키운 나무들이다.
백송도 봄이면 여느 소나무들과 같이 꽃을 피우지만, 그것의 꽃가루를 받아줄 다른 나무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가수정이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꽃가루받이를 겨우 이룬다 해도, 튼실한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 토종 생물의 생태계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여느 귀화식물과 달리 백송은 여전히 희귀 식물일 수밖에 없다.
까닭에 여태 살아 있는 백송은 대부분 식물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중국과의 교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실마리를 품은 문화재로서의 의미가 크다. 거개의 오래 된 백송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귀하게 보호하는 이유다. 추사가 자신의 생가 곁에 심은 예산 용궁리 백송 역시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한 문화재다.
흰빛의 얼룩이 돋보이는 예산 용궁리 백송의 신비로운 줄기.
신비로운 흰빛의 백송은 추사 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지 앞에 있다. 백송에서부터 과수원 길을 따라 600m쯤 걸어오면 추사 고택이 나온다. 나무 앞의 견고한 침묵과 달리 고택 주위에는 매운 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가는 사람이 다문다문 눈에 띈다. 젊은 연인도 있고, 삼대의 가족을 동반한 관광객도 있다. 그들 사이에 문화재 해설사 김선자(48)씨가 있다.
“백송은 흔치 않은 나무인데, 추사 선생은 어릴 때부터 백송을 보면서 자랐어요. 청나라 연경에서 백송을 들여올 만큼 애정이 각별했지요. 키우기 어려운 나무이지만, 고택 안팎에 몇 그루의 백송을 더 심은 것도 선생의 그런 뜻을 기리기 위한 거죠.”
추사 고택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김 해설사는 추사 선생의 행적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연물이 백송임을 강조한다. 고택 주위에 백송을 새로 심은 까닭도 자분자분 풀어놓는다.
고택 뒤란과 솟을삼문 앞에 제가끔 한 그루씩의 백송을 심은 건 28년 전이다. 뒤란의 백송은 젊은 나무의 기세로 잘 자랐으나, 솟을삼문 앞의 백송은 이태 전 여름에 말라죽어 어린 백송을 새로 심었다. 추사 고택에 백송이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추사가 백송을 처음 만난 건 천연기념물 제4호였던 서울 통의동 백송이었다. 1993년 고사해 지금은 볼 수 없는 나무로,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혼사를 치른 뒤, 영조가 마련해 준 월성위궁(月城尉宮·현재의 정부종합청사 부근) 앞에 서 있었다. 월성위궁에 머무르며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던 어린 시절의 추사에게 깊은 인상을 준 나무였다.
이후 24세의 청년이 된 추사가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간 적이 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연경에서는 백송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백송을 추사는 자신의 집에 가져다 심고 싶었다. 그때 그가 가져와 심은 나무가 바로 용궁리 백송이다.
●역사로 살아나는 나무의 견고한 침묵
훗날, 사람들은 추사가 백송의 씨앗을 필통에 넣어 들여왔다고도 하고 어린 묘목을 가지고 왔다고도 한다. 씨앗 번식이 쉽지 않은 백송의 생육 특징을 감안하면 묘목으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지난여름, 태풍 곤파스가 닥쳤을 때에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혹시라도 우리 백송이 다칠까 봐 안절부절못한 거죠. 그때 백송 주위에 서 있는 큰 나무 160그루가 처참하게 쓰러졌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많은 나무들이 무너져 내리던 그날 밤에도 백송은 가지 하나 부러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 남았어요.”
김 해설사의 홍조 띤 얼굴에 백송에 대한 극진한 애정이 한가득이다. 세개의 가지 가운데 두개를 잃고 한개의 가지만 남았건만, 나무가 뜸직한 자태로 추사의 삶을 증거할 수 있는 건 김 해설사처럼 나무를 제 몸처럼 여기는 이곳 사람들의 애정이 살아 있는 까닭인 게 분명하다.
다시 나무 앞에 섰다. 여전히 나무 앞에 놓인 침묵은 견고하다. 흐르는 바람 따라 백송 앞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은 아주 천천히 역사가 되고 언어가 된다. 침묵이 깊을수록 그 안에서 배어나오는 언어가 더 신비롭다는 걸 겨울 백송이 깨우쳐준다.
글 사진 예산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2011-01-2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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