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를 증명하지 못해 죄인이 되고야 마는…
2층으로 꾸며진 무대 양쪽 벽면엔 규격화된 사각형 철제 서류함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사람의 살아 있는 말 대신, 그 말들이 죽어 시체로 변한 문자만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세계다. 계단을 내려오면 1층에는 정면에 10개, 양쪽에 3개씩 모두 16개의 문이 달려 있다.9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막을 내린 ‘심판’(구태환 연출, 실험극단 제작)의 음울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원작을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와 천재 연출가로 꼽히는 장 루이 바로가 각색한 작품이다. 충분히 매혹적인 조건임에도 이런 음울함 때문에 무대에 자주 오르지 못한다. 2007년 공연 호평에도 불구하고 3년 만에 무대에 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무대가 커지면서 배우들의 다양한 동선과 군무가 극을 더 생생하게 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로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진지한 연극팬에겐 아쉬운 대목이다.
평범한 은행가 요셉 K는 어느날 체포된다. 누가, 무슨 죄로 체포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니 무죄를 주장할 방법이 없다. 웃긴 건, 체포는 됐는데 어디 가둬두지 않고 평소처럼 지내라고 한다. 요셉 K는 자신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예심판사에 줄을 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결국 실패한다.(참고로 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예심판사제는 예심판사가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수사기관의 기소권 남용을 막기 위한 장치다.)
재판을 엉망으로 망친 뒤 신부를 만나지만, 종교적 구원을 상징하는 그마저도 “잊지 말게. 나도 법에 속한 사람이라네.”라며 요셉 K를 외면한다. 남은 건 개죽음뿐.
법조항 요건에 맞는 사실관계를 발굴할 뿐인 법률가들은 언제나 ‘실체적 진실’ 운운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지독한 실체적 진실은, 법률가들은 끊임없이 거악(巨惡) 척결을 외치지만 동시에 거악을 끊임없이 기획·생산해내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니던가. 더구나 요즘처럼 ‘하 수상한 시절’에는.
“우리 시대, 산업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제도, 특히 국가를 의인화하여 결국 국가와 제도라는 것을 갖고 하느님을 만들어내고 마는구나.” 형사처벌 폐지론자인 네덜란드 사상가 루크 훌스만의 한탄이다. 원제 ‘The Trial’.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0-05-1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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