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혜영 정치부 기자
참사 이후 만난 사람들은 다들 처연했다. 가슴에 박힌 상처를 꺼내 보이며 그렇게 불길한 세월을 달래고 있었다.
1988년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동생을 대신해 투쟁의 한복판에 삶을 던진 한 인권활동가는 “다시 80년대로 돌아간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다. ‘용산참사’ 사망자들의 빈소가 있는 병원에서 밤을 새우느라 그렇지 않아도 검은 얼굴,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1980~90년대 반미운동의 기폭제가 됐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의 주역이었던 한 선배는 “부미방의 불은 꺼졌지만 내 마음의 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는다.”며 한탄했다.
지난해 촛불집회 때 구속됐던 후배 하나는 이번 ‘용산참사’ 집회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또다시 소환장을 받았다. “보석 허가를 내줬던 판사가 사표를 냈다.”며 그 후배는 머쓱해했다. 이번엔 끝까지 버텨야 한다며 선배들은 술잔을 건넸다.
새벽 2시에 영등포 후미진 노래방에서 갑자기 ‘광주출정가’ 노래가 생각이 안 난다며 자는 선배를 깨워낸 후배도 있었다. “야, 죽어라고 봄이 안 온다. 어쩌면 좋냐.”던 친구도 차디찬 겨울을 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엊그제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연신 청계광장 주변을 걷던 한 선생님은 1987년 얘기를 꺼냈다. 사슴같이 예쁜 눈을 가졌던 고 박종철이 떠오른다며. 그래도 그때는 분노라도 오래갔다고 혼잣말을 했다. 사람이 6명이나 죽었는데 이대로 잊혀져도 되는 거냐며 두렵다고 했다. 온 사회가 무덤 같단다.
‘걸인 한 사람이 한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 모두의 탓이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분노가 사라진 사회, 이런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 시절을 건너고 있다.
구혜영 정치부 기자 koohy@seoul.co.kr
2009-02-14 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