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국회의장에게 듣는다] “강경파 득세정치 희망 없어 국회 폭력고발 취하 않을 것”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듣는다] “강경파 득세정치 희망 없어 국회 폭력고발 취하 않을 것”

입력 2009-01-10 00:00
수정 2009-01-10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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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국회의장은 지난 7일 오후 집무실에서 모처럼 쉬었다. 파행국회가 정상화되면서 20여일 만에 되찾은 휴식이었다. 국회 귀빈식당에서 경위·방호원들과 위로 점심을 함께 한 뒤였다. 내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김 의장을 만났다. 그는 오찬에서 한 얘기부터 들려줬다. 국회 폭력사태를 끝까지 엄벌하겠다고 강조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소연이 이어졌다. 여야로부터 이렇게 덤터기를 많이 쓴 국회의장은 자신이 처음일 거라고 했다.

김 의장은 지난해 12월의 세 가지 일정을 소개했다. ①24일 전후 법안 40여건 제출 ②26일 한나라당 직권상정 요청 ③29일 한나라당 의원총회 결의. 그러곤 “말이 되느냐.”고 했다. 직권상정 거부에 대한 항변이었다. 끝까지 버티면서 교착국면 해소의 물꼬를 텄지만 친정의 평가는 후하지 않다. 한나라당 내에선 ‘배신자’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래서인지 2월 임시국회에서의 직권상정 가능성을 닫아 놓지는 않았다.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내친김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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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국회의장이 지난 7일 인터뷰에서 “합리적이고 온화한 사람이 강경파를 이기려면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히고 있다.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김형오 국회의장이 지난 7일 인터뷰에서 “합리적이고 온화한 사람이 강경파를 이기려면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히고 있다.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김 의장이 직권상정 거부를 선언하면서 파행정국이 풀리는 수순으로 급반전됐습니다. 그에 따라 국회가 가까스로 정상화됐지만 20여일간의 파행 등 과정을 놓고는 혹평이 적지 않습니다. 무법국회, 폭력국회, 만신창이 국회, 분노의 활극 등의 말들이 나오고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어렵사리 여야가 협상에 성공한 것만 해도 정말 다행입니다. 지난해 말 예산국회가 끝나자마자 여야는 전투모드로 돌변했습니다. 대화와 타협이 실종되고 오직 ‘돌격 앞으로’만 있었습니다. 국회의장으로 취임한 이래 일하는 국회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게 개인적으로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국회는 협상을 통해 풀어야 합니다.

→김 의장의 처신을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있었습니다.여당은 직권상정을 안 해준다고 불만이었고,야당은 여당 편을 든다고 공세를 취했습니다. 양줄타기라며 몰아세우는 여야의 틈바구니에 끼여 개인적인 고충도 많았을 터인데요.

-의회주의 원칙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스스로 달래 봅니다. 사방에서 오해와 압력, 회유와 강권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버텼습니다. 여야 모두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더 커진 것은 경계해야 할 대목이라고 봅니다. 강경파에 휘둘리는 정치는 희망이 없습니다. 물론 협상파, 온건파들이 좀 더 치밀하고 치열한 자세로 임했어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덜 긴장된 입장으로는 강경파에 먹히게 돼 있어요. 정치 협상이란 게 어려울 때에도 한 글자 한 글자 놓고 주고받으면 되고, 합의문에 근거해 대화와 타협의 정신으로 풀면 안될 게 없지요.

→하지만 김 의장이 결단을 못 내리고 우유부단하다거나 심지어 기회주의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사실입니다.

-합리적이고 온화한 사람이 강경파에 이기려면 원칙에 더 충실해야 합니다. 강경파에 굴복해선 안 되고, 강경파에 눌리면 온건 합리주의는 설 땅이 없습니다. 내 개인 이미지가 어떻게 각인되든 관계 없이 강요나 강박에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의지는 보여 줬다고 자부합니다. 내가 도중에 포기했다면 대화와 타협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불씨를 살리려고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거지요.

→파행 국회 과정에서 특히 친정격인 한나라당으로부터 불만이 많았습니다. 청와대도 마찬가지고요. 일부 강경파 초선은 불신임안 제출을 주장할 만큼 여권 내에서는 직권상정을 거부한 데 대해 배신감을 느낀 듯한데요.

-5선 의원을 지내는 동안은 물론 야당 생활 10년 동안 한나라당 밖을 1㎝라도 나갈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야당 때도 당직, 국회직 다 해봤어요. 대통령인수위 부위원장, 당 사무총장, 원내대표, 인재영입위원장 등을 지냈고요. 정권교체를 이룩하는 데 숨은 공로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 지지 속에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이명박 정부가 잘되려면 국회가 잘돼야 합니다.

이번에 민주주의란 어렵고 까다로운 것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속전속결로 거두절미하는 게 민주주의가 아니고, 또 정치는 행정과 다른 것이지요. 국회와 정부는 생태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런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정부가 졸속 제출한 법안을 직권상정했었다면 국민들의 불만을 사서 낭패를 봤을 것입니다.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40여개 법안이 제출됐어요. 그래 놓고 여당이 며칠도 안돼 직권상정을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29일엔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직권상정을 촉구하는 결의서까지 보냈고요. 국민을 우습게 보고 국회를 우습게 본 것이나 다름없어요. 다수당이라고 해도 권리행사는 정당해야 합니다.

→파행 국회로 고발 사태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국회 사무처가 민주당 문학진, 민주노동당 강기갑·이정희 의원 등을 고발했거나 고발하기로 하고, 한나라당도 이 3명을 별도로 고발 조치하기로 했습니다. 심지어 김 의장도 민주당에 의해 검찰에 고발당했는데요. 파행 국회에 이은 고발국회는 또 다른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의회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불법 폭력 행위는 끝까지 용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국회의장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의회주의 실종의 악순환을 반드시 근절시키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고발을 취하하는)정치적 타협도 일절 없을 것입니다. 필요하면 법과 제도도 고치겠습니다.

→이번 합의를 놓고 민주당은 승리를 자평하며 고무돼 있고, 한나라당은 지도부 책임론까지 나오면서 내홍에 빠지는 등 엇갈린 분위기인데요.

-야당은 대성공을 거두고, 여당은 큰 손해를 본 것처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야가 민생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하고, 중요 쟁점 법안을 협의 처리 또는 합의 처리토록 노력하기로 한 것은 어느 정도 여당 입장을 충족시켜 준 것이 아닙니까. 거의 모든 법안이란 게 정부 여당이 필요로 하는 겁니다.

협상 결과에 따라 처리 속도에 간격은 있지만 처리를 하기로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여당이 손해본 것은 없는 거지요. 야당도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일을 끝까지 못해 준 것은 잘못된 것이고요.

→파행국회가 20여일 계속되는 동안 국회의장으로서 여야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어떤 중재노력을 해왔습니까.

-그동안 여야 지도부와 중진 의원들을 두루 만났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김 의장에게 메신저를 16차례 보내 직·간접적으로 설득했지만 답신이 없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5선 의원을 하는 동안 쌓아놓은 개인적인 친밀도가 조금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때로는 반공식적으로, 때로는 보안 속에서 만나는 노력을 해 왔고, 그래서 이렇게 되지 않았겠나 생각을 해봅니다. 앞으로도 그런 역할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야간 대화 채널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원구성이 늦었고, 여야 긴장모드로 바뀌면서 대화채널이 가동되지 못했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 창구가 다양화될 것이고, 또 그렇게 돼야 합니다. 이름을 대기는 어렵지만 그분들이 협상에 역할을 해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

→야당 의원들의 국회의장실 점거 등으로 호텔에서 지내기도 하고, 지방행을 택하기도 했는데.

-야당 의원들이 의장실을 점거하고 의장 공관을 여러 차례 불시에 찾아오고 했습니다. 예전 국회의장들은 만나주고 했지만 나는 이번에 단연코 거절했습니다. 아예 의장 공관에 2주일간 들어가지 않고 서울시내 호텔을 전전하고서요. 항의성 방문에 접견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법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전 양해도 없고, 의도가 순수하지 않는 방문에는 앞으로도 말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인 것이지요. 어떤 이는 호통치라고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스스로 정치적으로 ‘쇼’하는 것이므로 하지 않았습니다. 불법·비법적인 것에는 타협도, 굴복도 하지 않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것이고, 그런 게 최근 정치와 다르다 보니 오해가 있었던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행보라는 지적도 있는데요. 당 대표 혹은 차기 대선 도전설과 연관 짓는 관측도 있고요.

-지지 세력이 있는 YS와는 다르죠. 의장실을 빼앗겨 남의 방을 빌려 집무를 보고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국회의장 알기를 뭣같이 아는데 항의의 표시로 떠난 겁니다. ‘쇼’하러 간 게 아니에요. 민주국회에서 이럴 수 있느냐, 화가 치밀었어요. 그걸 놓고 비난하거나 그런 해석을 한다면 내 생각과 다른 것이니 참고하죠. 하지만 선산을 다녀오니 우울했던 마음도 진정이 되더군요.

→여야가 쟁점법안에 대한 ‘합의 처리’,‘협의 처리’를 놓고 아전인수식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제2의 법안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양측이 끝내 평행선을 간다면 직권상정할 용의는 있는지요.

-앞으로 여야 정치력이 시험대에 오를 것입니다. 여야 모두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하는 겁니다. 멱살 잡는 싸움이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는 홍보전을 세게 붙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디어관련법이 민주당의 주장대로 악법인지, 선진국가로 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법인지, 진지한 토론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라 국민의 판단이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국회의장이 움직일 것입니다.

직권상정을 좋아하는 국회의장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직권상정은 다수당이 소수당에 의해 방해받을 때 하는 예외적인 조치입니다.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이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적 명령이 있다는 판단이 들 때는 예외적으로 써야 합니다. 앞으로 후임 의장이 불가피할 때에는 쓸 수 있도록 여지는 남겨놔야 하는 측면도 있고요.

박대출 선임기자 dc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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