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노벨문학상 수상 르 클레지오 본지에 미발표 시 게재

올 노벨문학상 수상 르 클레지오 본지에 미발표 시 게재

입력 2008-12-26 00:00
수정 2008-12-26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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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1960년대 이후 새로운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프랑스에 머물기보다 해외를 떠도는 시간이 많은 ‘유목민 작가’로도 유명한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2001년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찾은 그는 한국 문학과 영화에도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지난해 9월부터 1년 동안은 아예 이화여대에서 ‘현대 프랑스 문학비평’을 강의하기도 했다.그가 한국에 머물면서 친분을 쌓은 송기정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를 통해 서울신문에 한국에 대한 상념을 담은 미발표시를 보내왔다.송 교수의 번역과 해설을 담아 싣는다.

동양,서양 (역사-몽환 시)/르 클레지오

시속 사십 킬로미터의 바람이 부는

만 이천 미터 고도 위를

시속 팔백칠십 마일의 속도로 달려

네 시간 만에

빙하지역의 다리를 건너

하얀 호수,숲

툰드라를 지나왔다

그곳은

뷔름 빙하작용이 있었던 약 이만 육천 년 전부터

수천 년 동안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많은 사람들

남자들

여자들

어린아이들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지나간 곳이다

새싹이 돋아나고

월귤나무가 덤불숲을 뒤덮는

봄이 오면

그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매일 아침 짐을 꾸렸다

마른 잎으로 만든 바구니에 양식거리 육포를 넣고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씨 버들 광주리 속에 꼭꼭 숨겼다

노인들은 등에다 부싯돌을 비끄러맸다

순록의 가죽으로 만든 요람 속에서 아이들은 칭얼거렸다

옅은 안개가 계곡에 보송보송한 바람을 가져다주고

풀밭 위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이끼 낀 돌멩이 위로 물은 졸졸 흘렀다

거리의 개들은 새벽이 오는 것을 기다리다 못해 짖어대 고

밤사이 늑대에 물린 친구를 애도하며 컹컹대곤 했다

여인들,

창과 도끼로 무장한 여인들이

사슴을 쫓아 자작나무 사시나무 숲 사이를 달리면

쫓기던 사슴은 강가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린다

날카로운 창으로 무장한 남자들은

곰, 그리고 부채 모양의 뿔이 달린 사슴을 사냥한다

저녁이면 언덕 위 숲 속 빈 터에

힘줄을 엮어 만든 텐트 속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든다

아마도 그들은 노래를 불렀겠지

할머니는 아이들을 재우느라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 여인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오두막집 모양의 그녀의 긴 옷자락

조개껍질로 장식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출렁 거렸다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망자들의 혼령을 부르거나

곧 태어날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여인들은 산파의 도움을 받으며 강가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일어나 두 발로 걸어갔다

그들과 함께 과거는 잊혀졌다

욘이라 불리던 용은 이름을 바꾸어

구름의 뱀,믹스코아틀,

날개 달린 뱀,쿠쿨칸이라 불릴 것이다

그들과 함께 네 가지 색깔도

북쪽의 흰색,남쪽의 노란색,

서쪽의 검은색,동쪽의 붉은색,

그리고 중앙에는,맞아,옥색이지

오늘날 동과 서를 잇는 다리는 잊혀졌다

비행기는 만 이천 미터의 높이에서 유배의 길 위를 날아간다

아메리카는 또 하나의 다른 대륙

동양, 서양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자신들이 길의 방향을 뒤집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얼굴에 담긴 평화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한다

저 먼 곳,뉴멕시코에서

떠나기 전,비행기 타기 바로 전날,

슈퍼마켓의 주차장에서

나는 어떤 나바시 인디언의 자동차를 보았다

그 차의 번호판 위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나는 한국을 기억한다”

■ 송기정 이대 교수의 시 해설

물질문명 이전 원초적 삶에 대한 그리움

‘역사-몽환 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르 클레지오가 뉴멕시코를 떠나 한국에 오는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상념을 그린 것이다.그는 2005년 대산재단이 주최한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포럼 이외의 모든 일정을 마다하고 호텔로 들어가 이 시를 지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날,슈퍼마켓에서 본 나바시 인디언의 ‘나는 한국을 기억한다.’는 글귀가 그로 하여금 이 시를 쓰게 했던 것이다.한국과 뉴멕시코….아주 먼 두 나라,아무 인연도 없어 보이는 한국인과 나바시 인디언….그 인디언은 왜 한국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작가는 비행기를 타고 시속 870마일의 속도로 달려 산을 넘고,물을 건너고,빙하지역을 넘어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날아왔다.그러나 수천 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그리고 두 다리로 걸어가며 수천 마일,수만 마일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봄이 오면 바구니에 양식을 넣고,꺼지지 않는 불씨를 소중히 간직하고서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향해 먼 길을 떠나곤 했던 것이다.무장한 여인들은 사슴을 쫓아 숲 속을 달리고 남자들은 사나운 짐승들을 사냥했다.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텐트 속에서 노래 부르며 잠드는 사람들,망자의 혼을 부르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를 축복하기 위해 춤을 추는 무녀,강가에서 아이를 낳는 여인네들….이 시에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정신을 배움으로써 삶의 ‘다른 가치’를 추구한 작가 르 클레지오의 면모가 두드러진다.원시문명에 대한 애정,신화적 세계로의 회귀,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꿈꾸는 동시에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한 르 클레지오는 이 시에서도 현대 물질문명 이전의 원초적인 삶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아메리카에 살던 사람들,유럽에 살던 사람들,그리고 아프리카에 살던 사람들….수천 년 전 지구 곳곳에 살았던 인류의 삶은 서로 다르지 않다.

동양,서양의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것일 뿐,인간은 하나이다.그러나 과거는 잊혀지고,동과 서는 대립한다.수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의 얼굴이 간직한 평화를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읽지 못한다.동과 서를 잇는 다리,지금은 잊혀진 그 다리를 다시 복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
2008-12-26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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