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인생경기 ‘1회전’ 마쳤죠
꿈, 그대처럼 강렬하고 가슴 뭉클해지는 말이 어디 있을까. 문득 영화 한편 떠올려보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절망에서 희망의 꿈을 엮어나가는 감동 드라마다. 여기에 나오는 명대사가 생각난다.‘자신만이 볼 수 있는 꿈, 바로 그 때문에 모든 걸 거는 거야!’최현미
이런 영화처럼 시작된 흔치 않은 인생이 있다.‘한국판 밀리언 달러 베이비’라고 하면 되겠다. 특히 ‘나 태어나 이 강산에서’의 꿈과 한을 간직한 외로운 ‘탈북소녀’이기에 흥행요소는 더욱 갖춰진다. 북한에서 권투선수를 하다가 2004년 7월 한국으로 온 최현미(18·염광고3)양이 주인공이다. 그의 꿈은 북한에서나 한국에서나 오로지 세계 최고의 복서가 되는 것이다. 지난달 11일 그는 첫번째 꿈을 이루었다. 세계복싱협회(WBA) 세계 여자페더급 57㎏챔피언 결정전에서 중국의 쉬춘옌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러자 국내보다는 오히려 세계의 매스컴들이 더욱 주목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한국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묘사하며 이례적으로 크게 보도했다. 인터넷판에는 사진 7장과 함께 전면에 배치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 앞에서 훈련하던 최현미는 남한에서 힙합 뮤직을 들으며 훈련하고 있다.”면서 “자기 체급의 모든 타이틀을 따내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또 독일TV-ARD와 뉴욕타임스, 영국의 BBC 등에서도 집중 인터뷰를 가질 정도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에 앞서 AP통신도 최양을 ‘한국의 밀리언∼’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그가 진정으로 주목받는 까닭이 뭘까.‘세계챔프의 탈북소녀’라는 제목도 그럴듯하겠지만 한창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지낼 나이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꿈을 향해 고독하고도 거침없이 달려가는 앳된 10대 소녀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에 있을 땐 대동강변에서, 한국에서는 한강변을 거의 매일 20㎞씩 달리는 모습만 상상하더라도 말이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한남체육관’에서 열심히 권투연습 중인 최양을 만났다. 그는 감기몸살 기운이 약간 있어서 그런지 컨디션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밝게 웃는 모습, 순수한 말투는 평범한 여고3년생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 견디기 힘든 혹독한 훈련 때문인지 가끔 글썽이는 눈물을 몰래 감추려는 모습을 볼 때 약간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세계 챔피언이 되고 나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글쎄요. 별로 없어요. 매스컴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아진 것 외에는….”
▶지난번 챔피언 결정전에서 주먹으로 맞았을 때 많이 아프지 않았나요.
“몇대 안 맞은 것 같은데, 나중에 얼굴을 보니 퉁퉁 부었더라고요. 저는 2,3일이면 부은 것이 금방 가라앉아요.”
▶하루 운동량은 어느 정도 되나요.
“오후 2시까지는 학교에 있다가 그 후부터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해요. 줄넘기와 섀도복싱, 스파링파트너 오빠들과 연습경기도 하고요. 집에 가면 밤 11시쯤 돼요. 시합이 임박할 경우 한강에서 20㎞, 남산에서 8㎞ 정도 거의 매일 뛰면서 체력을 집중적으로 키웁니다. 아마추어 땐 3회전을 뛰었는데 프로경기는 10회전이잖아요.”
▶주무기는 어떤 것인가요.
“잽과 스트레이트라고 생각해요.”
▶복싱은 서로 때리고 맞는, 아주 힘든 운동인데 어떻게 해서 시작했나요.
“4년제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고등중학교에 입학할 때였지요.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빠르고 체격조건도 좋으니 권투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아마 그때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여자복싱종목이 생길 것을 예상해서 복싱 유망주를 발굴했나봐요. 그렇게 해서 2001년 9월부터 북한 체육회의 특별관리를 받았고 2003년 김철주 사범대학 복싱양성반에서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지요.”
그는 1990년 평양 대동강변에서 태어났다. 한때 아버지는 복싱선수, 어머니는 배구선수를 했을 정도로 타고난 체격조건(키170㎝)을 이어받았다. 북한에서 동료 선수들과 시합을 해도 지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탈북한 것은 2004년 2월. 이때 아버지 최철수씨는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했다. 중국여권을 가진 터라 국경을 넘나드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하루는 가족여행을 떠나자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어머니와 오빠도 동행했다. 중국의 운남성을 거쳐 베트남에 왔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한테 “우리는 한국으로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후 캄보디아와 태국을 거쳐 가족들과 한국에 도착한 그는 이듬해부터 복싱글러브를 다시 꼈다. 아마추어 무대에 뛰어들자마자 5개 대회를 석권하는 등 2007년 9월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아마추어 전적은 16승1패. 이 가운데 14승이 프로의 TKO와 같은 RSC승이다. 한때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했던 탄탄한 기본기가 있어서인지 그는 프로전향 후 두 경기 만에 세계챔피언에 올라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른 직후 트로피를 들고 부모님 앞에서 하염없이 울어버렸다. 아마 고된 훈련을 이겨내면서 탈북 후 첫 꿈을 이룬 감격의 눈물이었을 터이다.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지낼까.
“노원구에 있는 월세 25평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가 얼마 전까지 식당일을 틈틈이 했는데 지금은 허리가 아파서 쉬고 계세요. 원래 어머니는 저를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허리가 안 좋아요. 오빠는 연세대 2학년에 재학 중이고요.”
아버지도 현재 직업이 없다. 집안살림은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정착금으로)월세 내고 휴대전화 요금 내면 끝난다.”고 했다.
▶고3인데 대학진학은 어떻게 되는지.
“지난번 챔피언 결정전 시합이 수시일정과 맞물려 원서를 넣지 못했습니다. 체육특기자로 가려고 하는데 대부분 구기종목만 뽑아요. 복싱 특기자로 뽑는 대학이 별로 없어 억울해요. 정말 불공평해요. 재수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이 부분에 이르자 고개를 떨구더니 “대학에는 꼭 가야 하는데….”라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눈가가 약간 젖어 있었다.
▶장래의 꿈은 무엇인가요.
“복싱으로 세계 최고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되려면 우선 WBA와 WBC 등 세계 통합챔피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나이들어 복싱을 그만두게 되면 연예계로 진출하고 싶어요. 씨름선수였던 강호동과 이만기 아저씨처럼 연예계에서 성공을 거두고 싶어요. 노래와 춤에는 어느 정도 자신있거든요.”
▶복싱을 시작한 후 후회는 한번도 없었나요.
“훈련을 참기 힘들어 울면서 뛴 경우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친구와 부모님 얘기가 많이 도움이 됐어요.‘너는 반드시 이길 거야, 너는 해낼 거야.’라는….”
학교공부 중 가장 재미있는 과목은 역사라고 했다. 또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며 친구들과 영화관에도 자주 간다고 했다. 영화는 ‘밀리언∼’와 ‘1번가의 기적’을 감동있게 봤다면서 ‘밀리언∼’의 경우 해피엔딩이 아니어서 끝부분에는 마음에 안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온갖 고생을 하더라도 나중에는 행복해지는 그런 영화를 좋아한단다. 어쩌면 그의 인생도 마찬가지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 나오는 것처럼,‘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최현미는 누구
▲1990년 평양 출생.
▲2001년 9월 복싱선수 발탁.
▲03년 김철주 사범대학 복싱양성소 입소훈련.
▲04년 2월 탈북,7월 한국도착.
▲05년 3월 AP통신 ‘한국판 밀리언 달러 베이비’ 소개.
▲05∼07년 9월 아마추어전적 16승1패(14RSC승).
▲07년 9월 프로전향.
▲08년 10월 중국 쉬춘옌 3대0승, 세계복싱협회(WBA) 여자페더급 챔피언 등극.
2008-11-10 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