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5년 퉁밍거티무르가 입조(入朝)해 건주위도지휘사에 임명된 이래 명의 여진족에 대한 포섭작업은 가속이 붙었다. 영락제(永樂帝)는 1409년 흑룡강, 우수리강 유역의 광활한 지역을 총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퉁밍거티무르를 비롯한 여진족 추장들은 노아간도사 아래 편제된 수많은 위소(衛所)들의 장(長)으로 임명돼 명의 신하가 되었다. 명은 위소 우두머리의 임명과 위소 상호간의 분쟁에는 개입했지만 위소의 통치는 여진족의 자율에 맡기는 체제를 만들었다. 만주에 대한 명의 지배는 점차 확고해져갔다. 이제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 만주를 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명 견제하의 조선-여진관계
영락제가 만주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히 했던 뒤에도 조선과 여진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조선은 여전히 오도리, 오랑캐, 우디캐 등 여진 종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했다. 여진인들은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한양에 와서 조공했다. 조선은 입조했던 추장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회사(回賜)라는 명목으로 각종 물자를 제공했다.
태조부터 성종(成宗) 때까지 여진족들의 조공 횟수는 거의 1100차례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여진족 가운데는 아예 조선에 귀화를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조선은 귀화한 여진인들을 향화인(向化人)이라 부르며, 그들을 내지로 이주시켜 집과 땅 등의 생활기반을 제공했다.
조선은 1406년 경원(慶源)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해 여진족들과의 교역을 허용했다. 여진족들은 말, 모피, 진주 등 자신들의 특산물을 가져와서 면포, 소금, 솥, 농기구, 소(耕牛) 등을 바꿔갔다. 주로 수렵이나 유목에 종사하다가 점차 농경의 필요성에 눈떠 가고 있던 여진족들에게 조선에서 구입한 소나 농기구는 매우 소중했다.
조선과 여진 사이의 이같은 교류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조선과 여진의 교섭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명은 1458년(세조 4), 건주좌위 도독 동창(童倉)이 조선에서 벼슬을 받았던 사실을 알게 되자 양자의 접촉을 엄금했다. 하지만 여진족들은 경제적으로 이득이 컸던 조선과의 관계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조선 또한 여진족들을 일종의 ‘울타리’로 생각했고, 그들을 초무(招撫)하여 몽골 침략 이래 보전하지 못했던 북방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
세종 연간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을 설치해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강역을 확보했던 것은 그같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조선은 또한 여진을 회유하여 스스로를 ‘상국’으로 자부하며 문화적 우월의식을 나타냈다.‘조선의 문물(文物)과 교화(敎化)를 사모하여 귀화한 여진인’을 뜻하는 ‘향화인’이란 말 속에 그같은 의식이 담겨 있었다.
●왜란시 절감한 누르하치의 위협
16세기 이후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관심은 15세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명이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조선의 여진 접근을 견제했던 영향이 컸다. 또 여진세력 자체가 조선 안보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이성량(李成梁)이 활약하던 16세기 후반까지는 여진족 내부에서 조선을 위협할 만한 유력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껏 두만강 부근의 여진족들이 간헐적으로 침략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는 정도였다.
16세기 후반 선조대에 이르러 조선의 권력은 사림파(士林派)에게 돌아갔다.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지향하던 그들은 ‘고구려 고토의 회복’과 같은 대외적 팽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명에 대해 공손히 사대(事大)만 잘하면 대외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여진이나 일본은 그저 교화시켜야 할, 조선보다 한 단계 낮은 ‘야만족’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당시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누르하치에 대해 정확한 정보나 인식을 가질 리 없었다. 정확하지 못한 대외인식의 귀결은 먼저 임진왜란으로 나타났다.
1592년 9월, 누르하치의 원병 파견 제의를 받은 조선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야기한 바 있다.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지휘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누르하치 군대의 ‘위력’을 이야기했다.
‘그들 기마군단의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일본군에게 밀리면 도주하면 되지만, 누르하치 군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선조와 조정은 바짝 긴장했다.
그 와중에 1595년(선조 28), 산삼을 캐기 위해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잠입했던 건주 여진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이 조선 영내에서 소를 훔쳐가자 위원 군수 김대축(金大畜)이 여진인을 사로잡아 죽인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 사건 때문에 누르하치가 침략해 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누르하치가 격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해 10월, 선조는 신료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올 수 없었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일본군과 맞서고 있는 현실에서 서북변 방어는 거의 방치돼 있었다. 그렇다고 남방의 병력을 빼서 서북쪽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충일(申忠一) 허투알라로 보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은 고육지책을 생각해냈다. 명의 권위를 빌려 누르하치의 침략을 견제한다는 복안이었다. 그 계책은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주도했다.
이덕형은 명나라 장수 호대수(胡大受)를 움직였다. 호대수의 참모 여희원(余希元)을 건주여진 지역으로 들여보내 누르하치를 선유(宣諭)하도록 했다. 조선 관원에게도 중국인 옷을 입혀 동행시켰다.
1595년 11월, 여희원은 누르하치의 부장(副將)을 만나 여진인들이 조선 영내로 잠입한 것을 힐책하고, 조선에 보복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선은 여희원을 통해 응급조치를 취한 후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다.
선조는 누르하치를 회유하기 위해 비단을 제공하고, 이후 산삼을 캐기 위해 넘어오는 여진인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 들판을 완전히 비우고 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청야책(淸野策)을 연구할 것을 강조했다.
조선은 나아가 남부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이란 인물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냈다. 조선인의 눈으로 누르하치 진영의 상황을 직접 정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처였다. 신충일은 1596년 1월, 허투알라를 다녀온 뒤 선조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유명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가 그것이다. 이는 오늘날 청 초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신충일의 보고서를 본 뒤 선조는 “천지의 기세가 바뀌고 있다.”며 탄식했다. 이어 신료들에게 누르하치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북쪽의 ‘오랑캐’, 남쪽의 ‘왜구’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의해 포위된 조선의 현실을 새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정세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임진왜란을 불렀던 것은 과오였지만, 선조 정권의 누르하치에 대한 대책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누르하치를 견제할 만한 자체 역량이 없는 현실에서 명의 권위를 이용하고,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겪으면서 역설적이지만 조선은 외교적 감각을 키웠던 것이다.
6자회담이 어렵사리 타결됐지만 동북아 평화를 위해 아직 갈길이 먼 오늘날, 선조대의 누르하치 정책은 소중하게 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거울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명 견제하의 조선-여진관계
영락제가 만주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히 했던 뒤에도 조선과 여진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조선은 여전히 오도리, 오랑캐, 우디캐 등 여진 종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했다. 여진인들은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한양에 와서 조공했다. 조선은 입조했던 추장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회사(回賜)라는 명목으로 각종 물자를 제공했다.
태조부터 성종(成宗) 때까지 여진족들의 조공 횟수는 거의 1100차례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여진족 가운데는 아예 조선에 귀화를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조선은 귀화한 여진인들을 향화인(向化人)이라 부르며, 그들을 내지로 이주시켜 집과 땅 등의 생활기반을 제공했다.
조선은 1406년 경원(慶源)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해 여진족들과의 교역을 허용했다. 여진족들은 말, 모피, 진주 등 자신들의 특산물을 가져와서 면포, 소금, 솥, 농기구, 소(耕牛) 등을 바꿔갔다. 주로 수렵이나 유목에 종사하다가 점차 농경의 필요성에 눈떠 가고 있던 여진족들에게 조선에서 구입한 소나 농기구는 매우 소중했다.
조선과 여진 사이의 이같은 교류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조선과 여진의 교섭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명은 1458년(세조 4), 건주좌위 도독 동창(童倉)이 조선에서 벼슬을 받았던 사실을 알게 되자 양자의 접촉을 엄금했다. 하지만 여진족들은 경제적으로 이득이 컸던 조선과의 관계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조선 또한 여진족들을 일종의 ‘울타리’로 생각했고, 그들을 초무(招撫)하여 몽골 침략 이래 보전하지 못했던 북방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
세종 연간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을 설치해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강역을 확보했던 것은 그같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조선은 또한 여진을 회유하여 스스로를 ‘상국’으로 자부하며 문화적 우월의식을 나타냈다.‘조선의 문물(文物)과 교화(敎化)를 사모하여 귀화한 여진인’을 뜻하는 ‘향화인’이란 말 속에 그같은 의식이 담겨 있었다.
●왜란시 절감한 누르하치의 위협
16세기 이후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관심은 15세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명이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조선의 여진 접근을 견제했던 영향이 컸다. 또 여진세력 자체가 조선 안보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이성량(李成梁)이 활약하던 16세기 후반까지는 여진족 내부에서 조선을 위협할 만한 유력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껏 두만강 부근의 여진족들이 간헐적으로 침략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는 정도였다.
16세기 후반 선조대에 이르러 조선의 권력은 사림파(士林派)에게 돌아갔다.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지향하던 그들은 ‘고구려 고토의 회복’과 같은 대외적 팽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명에 대해 공손히 사대(事大)만 잘하면 대외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여진이나 일본은 그저 교화시켜야 할, 조선보다 한 단계 낮은 ‘야만족’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당시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누르하치에 대해 정확한 정보나 인식을 가질 리 없었다. 정확하지 못한 대외인식의 귀결은 먼저 임진왜란으로 나타났다.
1592년 9월, 누르하치의 원병 파견 제의를 받은 조선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야기한 바 있다.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지휘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누르하치 군대의 ‘위력’을 이야기했다.
‘그들 기마군단의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일본군에게 밀리면 도주하면 되지만, 누르하치 군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선조와 조정은 바짝 긴장했다.
그 와중에 1595년(선조 28), 산삼을 캐기 위해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잠입했던 건주 여진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이 조선 영내에서 소를 훔쳐가자 위원 군수 김대축(金大畜)이 여진인을 사로잡아 죽인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 사건 때문에 누르하치가 침략해 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누르하치가 격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해 10월, 선조는 신료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올 수 없었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일본군과 맞서고 있는 현실에서 서북변 방어는 거의 방치돼 있었다. 그렇다고 남방의 병력을 빼서 서북쪽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충일(申忠一) 허투알라로 보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은 고육지책을 생각해냈다. 명의 권위를 빌려 누르하치의 침략을 견제한다는 복안이었다. 그 계책은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주도했다.
이덕형은 명나라 장수 호대수(胡大受)를 움직였다. 호대수의 참모 여희원(余希元)을 건주여진 지역으로 들여보내 누르하치를 선유(宣諭)하도록 했다. 조선 관원에게도 중국인 옷을 입혀 동행시켰다.
1595년 11월, 여희원은 누르하치의 부장(副將)을 만나 여진인들이 조선 영내로 잠입한 것을 힐책하고, 조선에 보복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선은 여희원을 통해 응급조치를 취한 후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다.
선조는 누르하치를 회유하기 위해 비단을 제공하고, 이후 산삼을 캐기 위해 넘어오는 여진인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 들판을 완전히 비우고 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청야책(淸野策)을 연구할 것을 강조했다.
조선은 나아가 남부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이란 인물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냈다. 조선인의 눈으로 누르하치 진영의 상황을 직접 정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처였다. 신충일은 1596년 1월, 허투알라를 다녀온 뒤 선조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유명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가 그것이다. 이는 오늘날 청 초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신충일의 보고서를 본 뒤 선조는 “천지의 기세가 바뀌고 있다.”며 탄식했다. 이어 신료들에게 누르하치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북쪽의 ‘오랑캐’, 남쪽의 ‘왜구’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의해 포위된 조선의 현실을 새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정세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임진왜란을 불렀던 것은 과오였지만, 선조 정권의 누르하치에 대한 대책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누르하치를 견제할 만한 자체 역량이 없는 현실에서 명의 권위를 이용하고,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겪으면서 역설적이지만 조선은 외교적 감각을 키웠던 것이다.
6자회담이 어렵사리 타결됐지만 동북아 평화를 위해 아직 갈길이 먼 오늘날, 선조대의 누르하치 정책은 소중하게 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거울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2007-02-15 26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