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번역청’설립하라/김종면 문화부 부장급

[데스크시각] ‘번역청’설립하라/김종면 문화부 부장급

입력 2006-11-22 00:00
수정 2006-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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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번역의 시대’다.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5%대였던 국내 신간도서 가운데 번역서의 비율은 최근 몇년 새 30% 가까이 치솟기도 했다. 베스트셀러 상위권은 으레 외국 저작물이 차지하는 것만 봐도 번역서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과연 진정한 의미의 번역문화가 있는가. 의미있는 책들이 제대로 된 역자에 의해 정상 경로로 번역돼 나오고 있는가. 최근 ‘마시멜로 이야기’의 대리번역 파동은 우리의 천박한 번역문화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주 한 토론회에서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는 “번역문제는 시급한 공공정책 과제의 하나”라며 “국가정책만이 수행할 수 있는 책임 영역으로 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국력에 비해 현 단계의 번역은 수준 이하라는 말도 했다.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소리일 뿐,‘국가’는 말이 없다.

물론 문화의 영역에 속하는 번역 문제를 국가에 떠맡길 수만은 없다. 문화 본연의 특성상 국가가 개입하기보다는 시장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이 저만치 홀로 고고하게 피어 있는 꽃은 아니다. 정치·경제 등 모든 부문과 밀접한 연관 아래 움직이는 역동적인 생명체다. 그런 만큼 번역사업이 국가정책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로 번역을 꼽는다.1868년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일본은 정부 안에 번역국을 두어 외국 서적을 대대적으로 번역했다. 웬만한 서양 고전학술서들은 그때 이미 번역돼 나왔다. 몽테스키외나 버크의 저작이 일본에서는 100여년 전에 번역됐지만 우리말로는 아직도 옮겨지지 않고 있다. 오늘의 일본은 메이지 시대의 만만찮은 번역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일본이 19세기에 정부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서양 고전 번역작업을 펼친데 비해 우리는 이제 겨우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해외 고전 번역 지원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명저번역지원사업’ 정도가 고작이다. 올 한해 예산이 20억원이니 국민의 정신을 살찌우는 국가적 사업이 강남 아파트 한 채 값밖에 되지 않느냐는 자조도 나올 만하다. 우리의 심각한 지적 근시안을 어떻게 교정해 나가야 할까.

기자는 이 시점에서 ‘번역청’의 설립을 제안한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있긴 하다. 번역원은 지난해 9월 재단법인에서 특수법인으로 바뀌면서 직제를 개편하고 인원도 확충하는 등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올해부터는 한국문학을 해외에 번역 소개하는 일 외에 ‘한국관련 서양고서 국역출판사업’도 벌이는 등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러나 문화관광부 소속 공공기관이라는 어정쩡한 번역원의 위상과 역할로는 본격적인 번역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가기 어렵다. 예컨대 일급 번역가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중등학교 외국어 교육과정부터 번역교육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런 정책과제를 번역원이 과연 추진할 수 있을까.

정부에 번역청을 두고 전문가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번역청장은 차관급으로 해 다양한 번역정책을 입안하고 번역사업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번역의 양극화 문제다. 이른 바 돈이 되는 자기계발서류의 책은 엄청난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재빨리 번역해 내지만 꼭 펴내야 할 고전엔 애써 눈감아버리는 것이 우리 출판계의 현실이다. 번역은 학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철없는’ 교수들도 적지 않다.

번역청이 생기면 이 같은 번역 역조 현상부터 해소해야 한다. 지식사회의 왜곡된 번역관을 바로잡아야 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고사하고 헤겔 전집 하나 자국어 번역본을 갖고 있지 못한 나라.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번역은 국격(國格)의 바로미터다.

김종면 문화부 부장급 jmkim@seoul.co.kr
2006-11-2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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