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고의사구/이용원 논설위원

[씨줄날줄] 고의사구/이용원 논설위원

이용원 기자
입력 2006-03-16 00:00
수정 2006-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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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사구(경원사구)처럼 야구의 특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전이 또 있을까. 여느 스포츠라면 공격할 때는 한걸음 더 나아가고 수비할 때는 상대의 진격을 막기 마련이다. 그런데 고의사구는 오히려 상대편을 베이스에 나가도록 강요한다. 자신을 완전히 죽여서 동료를 한 베이스 더 나가게 하는 번트, 상대의 허점을 틈타 베이스를 훔치는 도루도 야구만이 보여주는 별난 작전이다. 그래서 일부 호사가들은 야구를 비신사적이니, 스포츠답지 않다느니 말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작전이 경기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야구를 ‘인생과 가장 닮은 스포츠’로 자리매김해 준다.

야구 경기에 고의사구가 처음 등장했을 때엔 상대팀은 물론 관중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131년에 이르는 미국의 프로야구 역사에서 이 천재적인 작전이 언제 ‘발명’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메이저리그 규칙서에 고의사구 규정이 실린 해가 1920년이니 그 몇해 전에 선보였으리라 추정된다. 당시 규정은 ‘고의사구를 받을 때 포수는 뒤로 움직이지 못한다.’라는 것이었고 1955년에 ‘옆으로도 움직이지 못한다.’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메이저리그가 고의사구를 별도의 기록으로 분류, 통계를 내기 시작한 해는 1977년이다.

다른 작전이 그러하듯 고의사구도 ‘잘 쓰면 약이요, 못 쓰면 독’이다. 이 시대의 홈런왕 배리 본즈가 ‘700 홈런’ 고지를 향해 한창 치달을 때인 2004년 5월 메이저리그 일각에서 고의사구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의 흠런 기록에 제물이 되기 싫은 투수들이 고의사구를 남발했기 때문이다. 그해 본즈는 고의사구 120개를 얻어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시즌 말이면 상대팀 선수가 신기록 세우는 것을 견제하고자 고의사구를 쓰는 일이 종종 있어 큰 시비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제 미국 애너하임에서 벌어진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한·미전에서 미국팀이 4회 말 이승엽 선수를 고의사구로 내보냈다. 야구를 즐긴 지난 40년 세월에서 만난 가장 기분 좋은 고의사구였다. 이어 승부에 쐐기를 박는 최희섭 선수의 3점 홈런까지 덤으로 즐겼으니 이 기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2006-03-1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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