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불수의 서예가 유희강씨

반신불수의 서예가 유희강씨

입력 2006-02-15 00:00
수정 2006-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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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으로 붓글씨를 쓰는 서예가가 탄생했다.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의 왼손잡이는 아닌 인물이 바른 손의 기능이 마비되자 집념을 왼손에 옮겨 불사조 처럼 되살아 난 것이다. 사람의 의욕은 끝없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무언 중에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재기 불능이라던 중풍을 집념으로 이기고 첫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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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으로 연습에 골몰하는 劍如 柳熙綱씨.
왼손으로 연습에 골몰하는 劍如 柳熙綱씨.
劍如 柳熙綱(검여 유희강•59•서울 영등포구 화곡동 61의99 주택207호)씨는 딸 小英(소영•23•홍익대미대 동양화과 졸) 양의 부축을 받아 아침 저녁 뜰을 거닐면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창백한 얼굴. 쇠약해서 바람이 불면 날려갈듯한 몸이다. 한쪽 편을 못 쓰는 조각 난 몸에 뜰의 분홍장미들 보다 더 뜨거운 것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짐작할 사람은 몇명이나 될까?

왼손으로 붓글씨를 써서 다시 세상에 나가겠다는 꿈틀거림이 그것이다.

그 의지의 싸움에서 그는 일단 승리했다. 6월 20일부터 25일까지 서울 국립공보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서예가협회 전시회」에 다른 서예가와 함께 씨의 작품 1점도 나란히 출품되었다. 원래 바른 손으로 붓을 잡던 씨가 중풍인 몸을 채찍질해서 왼 손으로 써낸 작품이다.

세상은 그를 재기불능이라고 평했다. 그는 작년 9월7일 동양화가 霽堂 裵廉(제당 배렴)씨의 장례식에 참례한 뒤 집에 돌아오자 뇌일혈로 쓰러졌었다. 다행히 큰일이 나지는 않았지만 죽음의 선고와 같은 증상에 빠졌다. 몸의 오른 쪽 부분을 못 쓰게 된 것이다.

고요히 잊혀져 가는 인물로 처졌다. 세상은 그 재능을 아까와 했고 그 기골있는 붓글씨에 다시 접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안타까와 했다.

그는 우리나라 서예가로서는 드물게 젊을 때 淸國(청국)에 건너가 上海(상해)미술학교에서 서양화와 서예를 공부했다. 서양화로 출발해서 서예로 전향했다.

처음엔 한字를 써도 떨려 그만 붓을 놓아버리더니

제2회 國展(국전) 때 서양화부와 서예부에 동시에 출품한 뒤로는 서예 하나에만 전념, 특히 大朝(대조)시대의 隸書體(예서체)에 있어서 독특한 경지를 이룩해 왔고 해마다 海印寺(해인사)의 숲 우거진 계곡에서 붓글씨를 닦고 갈았다.

1955년 이후로는 國展 서예부 심사위원을 연임해 왔다. 그의 글씨를 평자는 꿋꿋하고 근엄한 힘이 응결된 서예양식이라고 했다.

또 어떤 평자는 천진절벽에 홀로 꽂힌 마른 향나무를 둔한 도끼로 마구 찍어 우틀두틀한 자국을 내었는데 그윽함을 느끼게 하는 필력- 이라고도 비유했다.

幽玄美(유현미)가 있다고도 했다.

왼손으로 쓴 글씨가 옛날의 기골을 가지게 될 것인가에 대해 세상은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다.

줄곧 병시중을 들어 온 딸 小英양은 『아버지가 낱말도 많이 잊으시고 글뜻도 모르시게 된 것이 많은데 차차 연습을 거듭할수록 필법이 옛날과 닮아 가신다』고 신기해 하고 있다. 『글씨도 옛날에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화곡동 자택에서 小英양의 부축을 받으면서 서울시내 모 한의에게 매일 침을 맞으러 다닐 정도는 회복이 되었다. 안마사의 치료도 받고 있다.

그러한 사이사이에 매일 30분씩 화선지 2분의 1절 크기의 종이 5장에다가 왼손으로 연습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잔 글씨 쓰기부터 시작했다. 그것을 두 서너 글자만 써도 팔 다리가 떨려서 그만 붓을 놓아 버리기를 열흘 이상이나 거듭했다.

더욱이 창립에 참여한 한국서예가협회의 전시회를 목전에 두고 의욕을 불태웠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제자들의 작품전서 자극 이튿날 紙墨(지묵) 가져오라고

그는 별로 말이 없다.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직도 제대로 하지를 못한다. 입은 낱말을 분명히 소리내기는 한다. 그런데 여러 낱말들이 연결이 되지 않는다. 낱말이 온전한「센텐스」를 이루지 못해 듣는 이에게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겨우 기동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몸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습시간이 오면-대체로 하오이지만- 그는 병상에서 상반신을 도움받아 일으켜 세운다. 그 앞에 책상과 종이가 놓여진다. 그는 왼 손에 붓을 들고 글씨를 써 나간다. 그러다가 지치면 누워 버린다.

연습을 시작한 것은 금년 4월부터였으니 3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출품작을 제작해 낸 셈이다.

4월부터 연습을 시작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듯 하다. 4월1일~7일 사이의 1주일 간 상업은행 화랑에서는 금년들어 최초의 서예전시회가 열렸었다. 그것이 劍如書院展(검여서원전)이었다. 문하생들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전시회를 연 것이었다. 오랫동안(7개월간) 스승의 직접지도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제자들 끼리 부지런히 공부해왔다는 증거들이었다. 이 때 출품작은 모두 40점이었다.

바퀴의자에 실려 회장에 나타난 그는 제자들의 부축으로 방명록 제1호로 자기 이름을 적었다. 그에 앞서 왼손에 가위를 쥐고 간신히 회장의「테이프」를 끊는 늙은 서예가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케 했다.

小英양 얘기로는 劍如는 그다음 날인 2일 하오에 딸을 병실에 불러 몸을 붙들어 일으키게 하고 글씨쓰는 시늉을 하면서 붓과 종이를 청했다.

그의 서숙 劍如書院(서울 안국동)에서는 그가 건강했을 때와 다름없이 제자들이 모여 스승없는 精進(정진)에 몰두하고 있다.

한편 그 스승은 스승대로 반신불수의 몸을 움직여 한국서예사상 최초인 右手(우수)에서 左手書(좌수서)에로의 기적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는 언젠가 가까운 동연배의 서예가에게 淸나라에서 글씨 배웠을 때의 경험을 말한 일이 있다.

왼손글씨 없지는 않아도 중풍 이기는 名筆은 처음

『그 스승이 가르치는 방법을 가만히 보았더니 제자들에게 일일이 지도를 하지는 않았다. 제자들 스스로가 자기 것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말없는 지도를 하였다』

그 기풍이 劍如의 제자들에게도 배어 스승없이 서예전을 열어 스승을 격려했고 그 역시 홀로 새 경지를 헤쳐 여는데 집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왼손글씨의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골의 사당에는 左手書라는 단서가 찍힌 현판이 걸린 곳이 여러군데 있다. 그러나 그 左手書는 원래가 왼손잡이의 글씨 아니면 바른 손도 쓰면서 餘技(여기)삼아 왼손을 움직여 본 글씨들이다.

劍如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는 바른 손으로 높은 봉우리를 이룩한 뒤 더욱이 환갑을 1년 앞두고 그 손의 기능을 잃어서 붓을 다시 왼손에 고쳐 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서예사상 처음 있는 일을 그 병상에서 묵묵히 쌓아 올리고 있다.

[ 선데이서울 69년 6/22 제2권 25호 통권 제3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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