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대한축구협회 이회택 기술위원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대한축구협회 이회택 기술위원장

입력 2005-06-07 00:00
수정 2005-06-07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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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그분이 오셨다.’ 우선 2006독일월드컵 본선진출 여부가 곧 판가름난다. 네덜란드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도 이달에 열린다.3년전 한반도를 뒤흔든 ‘6월의 함성’이 다시 들려온다.

축구는 가장 스펙터클한 스포츠다. 감동과 환희, 좌절과 한숨…. 남녀노소를 동시에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거대한 응집력은 차라리 신화요, 전설이다. 누가 태극전사의 내달림을 보면서 웃고 울고, 마음 졸이지 않을 수 있으랴.

왕년의 스타플레이어 이회택씨. 현재는 축구협회 기술
왕년의 스타플레이어 이회택씨. 현재는 축구협회 기술 왕년의 스타플레이어 이회택씨. 현재는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맡아 월드컵대표팀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그는 “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잔디구장에서 뛰어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면서 지금은 선수들의 체력이나 체격, 정보와 전술 등 모든 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졌다고 말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축구인생 50년 ‘그라운드 풍운아’

추억의 방송멘트가 있다.“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메르데카배 축구대회가 열리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입니다.” 1970년대초였다. 농촌의 여름밤,TV는 물론 라디오조차 귀했기에 저녁밥 일찍 먹고 서둘러 라디오가 있는 이웃집으로 속속 모인다. 이어 중계방송이 시작되고 아나운서의 “슛, 아깝습니다. 슈∼웃, 골인!”하는 목소리에 탄식과 환호가 교차한다. 상상속에서 슛동작을 흉내내는 모습은 저마다의 흥분이요, 잊지 못할 추억거리였다.

맞다. 그때의 우상이었다. 아시아의 표범, 그라운드의 풍운아로 표현된다. 네살 때 아버지가 월북해 ‘고아’나 다름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버려진 깡통과 길가의 돌멩이들을 속절없이 걷어차기 일쑤였다. 파란과 곡절의 축구인생 50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회택(60)씨.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맡아 대표팀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그를 만났다. 키 173㎝, 짧은 머리에 어깨가 딱 벌어져 다부진 체격, 왕년의 스트라이커를 연상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 역시 그대로였다.

독일월드컵 본선진출을 장담한 그는 먼저 한국축구에 대해 “월드컵 4강에 오른 팀이다. 다만 월드컵 4강 당시 수비수 3명, 즉 홍명보 최진철 김태영 가운데 한 명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박주영 골결정력·패싱·순발력 3박자 겸비

공격라인에 대해서는 “박지성 차두리는 힘과 스피드가 좋아졌고, 안정환도 부상에서 회복됐다. 최근에는 박주영까지 가세했다. 경쟁이 아주 치열해졌다.”고 분석했다. 특히 박지성의 경우 공수에 걸쳐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패싱기술이 뛰어난 선수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박주영을 가리켜 골 결정력, 패싱력, 순발력 등 3박자를 모두 갖춘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여기에 이천수와 설기현이 들어오면 경쟁은 정말 가열된다고 부연했다. 송종국 선수를 거론하면서 “(송 선수가)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슬럼프에 빠져 있어 정말 아쉽다. 빨리 회복해 이들과 경쟁대열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본프레레 감독의 전술과 리더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히딩크 감독도 처음에는 욕을 먹었다. 결국 월드컵 4강에 올려놨다. 선수들도 죽어라 뛰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선수들은 자만심에 차 있고, 상대국가들은 우리나라를 반드시 꺾으려고 한다. 수비수를 더욱 보강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속에서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승부세계에서는 이기는 방법밖에 없다. 응집력과 투지가 관건이다.”

화제를 돌렸다. 현역시절인 70년대와 지금의 축구를 비교해달라고 했다.“당시에는 태클을 잘 하는 선수, 개인돌파가 좋은 선수 등 개인기술이 특징이었지만 지금은 체력과 체격이 아주 좋아졌다.”면서 “그때만 해도 잔디구장에서 축구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운동장 사정도 매우 좋아졌다.”고 말했다. 게다가 요즘에는 4-4-2,3-4-3 등 포메이션이 다양하고 국제정보에도 밝지만 그때는 전술과 정보가 보잘 것 없었다고 회고했다.

67년 중앙정보부서 징발 ‘양지팀’ 창단

#에피소드 1.67년 2월. 이회택은 연세대 입학을 일주일을 앞두고 축구부원들과 동계훈련 중이었다. 검은 지프 한 대가 훈련장에 도착했다. 한 사내가 내리더니 “이회택이 이리 나와.”라고 했다. 사내는 중앙정보부 감찰실의 임경옥씨. 당시 ‘중정’은 누구도 거역 못할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회택이 사내와 함께 도착한 곳은 이문동 중정 본부.

사연은 이러했다. 북한이 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르자 박정희 대통령이 크게 충격받았다. 김형욱 중정부장이 팔을 걷어붙였다. 축구깨나 한다는 사람들을 모두 징발했다. 감독 최정민, 골기퍼 이세연, 이회택 김호 김정남 김삼락 등 이른바 ‘양지팀’이 곧바로 조직됐다. 김 부장은 팀 창단식 때 이들을 불러모아 “모든 것을 지원해 줄 테니 빛을 보도록 만전을 기해달라.”고 훈시했다. 아울러 팀에서 뛰는 동안 군복무를 인정해주고 매달 2만원씩(쌀 한 가마니 4000원) 월급을 약속받았다. 잔디구장과 기숙사도 제공됐다. 갑작스러운 호강이 오히려 술과 도박을 가깝게 했다. 전적도 보잘것없었다.68년 5월 바그다드에서 열린 세계군인선수권대회에서 3전3패의 수모를 당했다. 이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전까지만 해도 축구가 인생의 전부였으나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양지팀 시절은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회고했다.

메르데카배 내기건 교민 비기기 작전 주문

#에피소드 2.68년 여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메르데카배 축구대회에 참가했다. 양지멤버가 주축인 대표팀은 패전을 거듭해 5,6위전으로 밀려났다. 상대는 인도. 당시만 해도 교포들이 거의 없어 외교관 부인들이 김치를 들고 와 응원할 정도였다. 그런데 말레이시아 교포라는 사람이 찾아와 고참선배를 만나고 갔다. 잠시 후 고참선배는 이회택 등 공격수들만 불러 비기는 작전을 주문했다. 교포가 비기는 쪽으로 상당액의 돈을 걸었으며 그럴 경우 배당액의 절반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이회택은 말이 되느냐며 출전했다. 하지만 경기내내 그 말이 떠올라 혼란스러웠다. 영문을 모르는 수비수들은 몸을 날리며 열심히 뛰었다. 그날따라 이세연 골기퍼는 인도선수들의 슛을 잘도 막아냈다. 경기 종료 직전. 이회택은 상대의 공을 뺏어 김기복 선수한테 슬쩍 패스를 했더니 그냥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결과는 1대0으로 이겼다.

이씨는 국민가수 조용필씨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72년 어느날 저녁. 서울 퇴계로의 라이온스 나이트클럽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조용필(보컬그룹 25시 멤버)과 처음 만났다. 이씨는 밴드를 무척 좋아했다. 이후 이씨는 조용필의 매니저 역할까지 했다. 잘 아는 킹레코드사의 박성배 사장에게 레코드 취입까지 부탁했다.‘돌아와요 부산항에’‘너무 짧아요’ 등을 이때 취입했다. 또 방송국 PD 등에게 연락해 조용필의 노래를 자주 내보내 줄 것을 부탁했다.‘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뒤에는 바로 이씨가 있었다.

이와 관련, 이씨는 “2년여전 조용필씨의 부인 장례식 때 만난 이후로 서로 바빠서 잘 안 만나게 된다.”면서 “언젠가 골프 라운드도 한번 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골프실력은 이븐파를 기록할 정도.

한때 국민가수 조용필 매니저 역할도

축구인 이회택. 비록 키는 작았지만 빠른 몸놀림과 날카로운 슈팅과 드리블, 그리고 대담성을 가진 천부적인 골잡이였다. 김포가 고향인 그는 어릴 적 돼지 오줌보와 깡통 등으로 축구놀이를 즐겼다. 초등학생때는 동네 형의 손을 잡고 조기축구회에 나가기도 했다. 중3 때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끼리 축구부를 조직, 대회에 출전했다.

고등학교 진학은 축구부가 있는 한양공고에 먼저 원서를 냈다. 퇴짜맞았다. 빠르지만 기술이 없다는 이유에서. 마음을 돌려 얼른 영등포공고에 진학했다. 고교 2년 때였다.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고교 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첫시합은 부산상고였고 두번째는 광주상고. 연거푸 2골씩 넣어 이겼다. 축구신동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어 동북고로 스카우트됐다.65년 청소년대표에 이어 이듬해 국가대표에 뽑혔다.75년까지 10년 동안 한국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다. 이후 86년 프로리그의 포항 아톰스의 감독을 맡아 두 차례 우승을 이끌었다.90년 대표팀 감독으로 이탈리아월드컵 본선에 참가해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74년 결혼한 그는 결혼한 딸(사위는 농구선수)이 얼마전 손자를 낳아 할아버지가 됐다. 아들은 한양대 1학년에 다니다 해군복무 중이다. 부인은 현재 방이동에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에 살던 부친은 2년전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km@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 1946년 경기 김포 출생

▲ 65년 서울 동북고 졸업

▲ 65년 청소년 국가대표팀 선수

▲ 66∼76년 국가대표팀 선수

▲ 69년 한양대 졸업

▲ 83∼85년 한양대 감독

▲ 86∼92년 포항제철 감독

▲ 90년 이탈리아월드컵 대표팀 감독

▲ 93∼2003년 대한축협회 이사

▲ 2003년 전남드래곤즈 상임고문

▲ 2004년∼현재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기술위원장
2005-06-0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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