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294)-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4)-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입력 2005-03-01 00:00
수정 2005-03-0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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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간신히 암벽위로 올라섰지만 무덤으로 가는 길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소나무가지를 헤치고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송림을 지나 무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비교적 양지바른 곳이라 무덤주위는 따뜻한 양광이 내리쬐고 있었다.

무덤 왼쪽에 묘비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검은 화강암으로 잘 깎아 만든 묘비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杜香之墓”

그 묘비를 보자 나는 마침내 두향의 무덤에 도착하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덤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봉분과 곡장(曲墻) 역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고, 곱게 입힌 떼도 한겨울을 이겨내고 누렇게 변색한 채 봄볕에 한가롭게 졸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두향의 무덤을 돌보고 있음일까. 미천한 기생의 몸으로 자식도 없이 연고도 없이 이곳에 묻힌 두향의 묘가 사후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처럼 연지곤지 찍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단장되고 있음은.

봉분 앞에는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놓는 돌상까지 차려져 있었다.

나는 봉분 앞에 서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탁 트인 호수 저편으로 한눈에 이퇴계가 가장 좋아하였던 구담봉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비록 강선대는 수몰되어 물에 잠겼다고는 하지만 바로 이곳, 이 자리가 퇴계가 두향과 더불어 노닐고 감흥에 젖어 시를 읊었던 로맨스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구담을 노래한 사람은 이퇴계 뿐이 아니다. 조선의 대학자로 이퇴계와 쌍벽을 이루던 이율곡도 구담봉을 지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지 않았던가.

“땅을 울리는 듯 잇단 피리소리에 나그네 놀라 깨니/어지러이 떨어지는 가을잎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라네/알지 못하겠구나. 밤이 새도록 찬강에 내리는 비가/수척이나 높은 구봉을 가벼이 넘나드니”

일찍이 명종 13년(1558년) 봄.22살의 청년 이율곡은 이미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은둔하고 있는 이퇴계를 만나서 사흘간의 짧은 기간동안이지만 가르침을 받는다.

이는 마치 도가를 창시한 노자와 유가를 창시한 공자의 만남처럼 세기적인 사건이다. 이때 이퇴계는 이미 58세의 노인. 비록 36살이나 차이 나는 노소의 만남이었지만 이 만남을 통해 이율곡은 개안하였으니, 눈을 뜨는 데는 천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보는 것(見)은 이처럼 찰나에 이루어지는 법이다.

따라서 이율곡이 구담봉을 지나면서 이 시를 읊은 것은 어쩌면 이퇴계를 방문하고 귀로에 오를 때였으니, 이율곡이 노래하였던 ‘알지 못하겠구나, 밤이 새도록 찬강에 내리는 비를(不知一夜寒江雨)’이라는 구절처럼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500년의 세월도 저 강 위에 내리는 한 방울의 빗줄기처럼 일말(一抹)의 거품인 것을, 그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을.

“해변(海邊)의 묘지”

문득 내 머리 속으로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의 대표적인 시가 한 수 떠올랐다.20년간의 긴 침묵 끝에 태어난 순수시의 결정판. 해변의 묘지는 ‘나의 혼이여 죽음 없는 생을 구하지 말라’는 핀다로스의 말을 새겨서 20세기가 낳은 천재시인 발레리가 144행으로 삶과 죽음을 우주적인 시야에서 노래한 최고의 걸작인 것이다.
2005-03-0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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