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에] 묵상과 투쟁/박기호 천주교 서울서교동 성당 주임신부

[토요일 아침에] 묵상과 투쟁/박기호 천주교 서울서교동 성당 주임신부

입력 2004-07-03 00:00
수정 2004-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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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넘기지 못한 달력을 뜯어낸다.2004년 새해를 시작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년이 어물어물 지나 7월이 시작되고 있다.

돌이켜보는 한해의 절반은 뭔가 어수선함뿐인 듯이 느껴진다.까닭 없이 바쁘기야 했겠는가마는 지나간 여섯 달이 유독 힘들게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사회적 이슈의 역동성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자의 생활이 그렇거니와,하물며 직장생활에 가족도 챙겨야 하는 이들은 아마 더욱 정신없는 세월이었을지 모른다.한해의 중간 지점,성찰의 주말로 삼고 싶다.

쏟아지는 뉴스는 홍수처럼 범람하고,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초하루에서 월말까지 해뜨고 달 져도 하늘 한번 쳐다 볼 일 없이 분주하다.

껌벅거리는 컴퓨터 앞에,공장 설비 라인의 소음에 동료 얼굴 한번 바라다 볼 이유 없이 살아간다.벙커 한 귀퉁이에 소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병사의 모습처럼 처연하다.

패배하면 포로가 될 것 같은 긴장과 절박감의 현장 속에 내가 있기 때문에,나의 처지가 곧 내 가족의 기쁨과 슬픔이기에,그래서 나는 꼭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기에,감사와 의미로 충만해야 할 일상이 전투처럼 느껴지는 비장함도 감당해 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럴수록 성찰의 삶이 요청된다.묵상 없는 투쟁은 목표와 방향을 놓치게 한다.전투에는 이기고도 전쟁은 패배할 수 있다.자기 전공 분야의 사회적 지위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 농사는 망쳐버린 경우를 많이 보았다.

토인비의 역사관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대응으로 쫓기는 숨가쁜 생활은 도전의 정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여 진실한 응전이 될 수 없게 한다.“노루를 쫓는 자 숲을 보지 못하고,구름에 취한 자 돌부리에 넘어진다.”고 했다.자기 손으로 빚어내고 있는 문제들의 성찰과 주변 세계에 대한 관조는 발아래 돌부리와 먼 강을 함께 볼 수 있게 한다.

농부는 아침저녁 논을 살피기에 물꼬를 틀 때인지 돌릴 때인지,호미로 막을 일인지 가래로 막을 일인지를 안다.삶의 이유와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뒷산에 올라 내 마을을 살펴보듯 한걸음 물러서 자신의 삶을 관조함이 필요하다.나의 오늘이 무엇으로 인하여 치열한지,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전해주는 기록을 ‘복음서’라고 한다.예수께서 가는 곳마다 수많은 환자들이 치유 받고자 몰려 인산인해를 이룬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식사를 걸러야 할 만큼 분주했던 예수님은 그날 밤이면 꼭 홀로 있는 시간을 가졌다.‘밀려드는 군중을 피해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셨다.’는 기록도 여러 곳에 등장한다.일손을 놓고 일상을 성찰함도 일의 한 부분이다.

무엇으로 인하여 늘 바쁜가? 분주한 만큼 효과적이었는가? 도끼날 가는 시간이 아깝다며 하루 종일 무딘 도끼질만 하고 있음은 어리석은 일이다.

깊은 묵상 속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지혜의 에너지야말로 효과적인 투쟁의 능력이다.

세상이 무척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성찰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징표다.사회의 수상함이 클수록 성찰의 시간도 넓이도 깊이도 함께 커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우리 시대의 진로를 얻는 길이 거기에 있다.

해 저문 들녘 지게를 지고 무심히 돌아오는 농부의 발걸음은 농부의 명상이다.

박기호 천주교 서울서교동 성당 주임신부 ˝
2004-07-03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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