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정치에 등돌린 국민

[열린세상] 정치에 등돌린 국민

한준 기자
입력 2003-12-23 00:00
업데이트 200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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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잇달아 드러나는 여야의 대선자금 불법모금의 전모를 보면서 국민들은 놀라움과 실망을 금치 못한다.그동안 여러번 정권이 바뀌고 비리가 드러나면서 정치권에 실망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겠지만 이번의 충격은 이전에 비해 더욱 크다.우선 액수의 규모가 엄청날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기업 대부분으로부터 골고루 받은 사실이 그러하다.청렴과 강직의 이미지를 줄곧 강조해온 이회창 후보가 직접 기자회견 후 검찰에 출두하는 모습은 참담함과 함께 허탈함 또한 느끼게 한다.현재 집권세력 역시 도덕성에 대한 타격은 남 못지않다.대통령과 저녁식탁에 마주앉아 정국을 논한다는 측근들이 줄줄이 검찰조사를 받고 구속되는 마당에 희망돼지저금통을 전시해 본들 국민들이 과연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년 전 불과 절반이 안 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일단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지지율은 이전의 어느 대통령만큼이나 높았다.국민들이 신임 대통령에게 기대했던 여러 가지 중에서도 특히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하지만일년이 지난 지금에도 국민들의 눈에 비친 정치 행태는 전혀 다를 것이 없다.일년 동안 계속된 정치권의 이전투구로 국회에 가득 쌓인 민생법안들은 해를 넘겨 또다시 일년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민생법안은 외면하면서 정치 쟁점을 놓고 줄다리기를 일삼다 세비 올리거나 선거구 수 늘리는 등의 일에만 여야가 일치단결하는 것이 정치권이라고 국민들은 생각한다.또 한 해를 보내며 과연 내년에는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희망의 신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총선으로 또 한번 온 나라가 한바탕 시끄럽겠다는 생각과 함께 유리한 외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풀리지 않는 경제에 대한 근심걱정이 앞설 뿐이다.

국민들의 희망을 실현시켜 주지 못하고 국민들의 괴로움을 공감하지 못하는 정치를 국민들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세계 40여 나라들이 참여하는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 1981년도 68%를 넘는 응답자들이 국회를 믿을 수 있다고 응답했던 것에 비해 20년이 지난 후에는 국회를 믿을 수 있다는 비율이 15%에 불과하다.다른 국내 조사에서는 국회를 신뢰할 수 있다는 비율이 10%도 채 못되는 것으로 나온다.세계가치조사에 참여한 나라들 중에서 남미의 두세 나라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그야말로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을 정도로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한다는 것을 조사결과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대동소이한 국민들의 인식이 엿보인다.올해 초 실시된 조사에서 우리 사회에 얼마나 기여한다고 생각하는지를 질문한 결과 정치인들이 사회에 기여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4%에 불과했다.고위공직자가 사회에 기여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0%였다.정치인과 고위공직자의 기여도가 가장 낮은 것으로 국민들은 생각하는 것이다.국민들이 정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권리행사를 포기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76%에 육박했던 투표율이 지난 2000년에는 57%로 떨어졌다.과연 내년에는 투표율이 얼마나 더 떨어질 것인가 눈 여겨 볼 일이다.

신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국민의 정부나 국회에 대한 신뢰는 개인간의 신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개인간에는 믿음직하지 못한 상대방을 믿어야 할 상황에서 상대방이 함부로 배신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로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하지만 정부나 국회 등의 제도에 대해서 국민들은 추상적 원칙과 명문화된 권리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대변해주지 못하는 정치인과 관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이 실질적으로 봉쇄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정치인과 정당이 민의를 대변하지 못할 때 국민들에게 남은 선택은 소외감을 안고 정치로부터 또한 공공영역으로부터 벗어나서 모든 것을 외면하고 자기 일만 신경 쓰고 사는 일이다.하지만 국민들이 외면하는 정부와 정치가 잘될 수는 없다.국민들의 신뢰는 정부와 정치가 누리는 정당성의 원천이다.정부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회복되지 못하면 ‘참여정부’의 정당성은 찾을 길이 없다.

한 준 연세대교수 사회학
2003-12-2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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