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폭로 철학

[씨줄날줄] 폭로 철학

양승현 기자 기자
입력 2003-11-22 00:00
수정 2003-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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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의 역사는 길다.아마 인류가 군락을 이루며 생활했을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여럿이 어울려 살게되면서 감추고 싶은 비밀이나 구린 것이 늘어나고,폭로도 덩달아 증가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폭로의 사전적 의미는 나쁜 일·음모·비밀을 드러내는 것을 뜻하는데,우리 정서상 여전히 낯설다.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고,아량을 베푸는 통 큰 사회,즉 ‘선비 정신’에 익숙한 문화코드에서 폭로는 고자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폭로가 갖는 정화와 예방의 순기능에도 불구하고,아직 토착화되지 못한 까닭은 남을 해코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민족 역사성의 발로이니,탓할 일은 못 된다.

우리에 비하면 서양은 폭로에 비교적 너그럽다.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나오는 화려한 꽃들의 탄생 비밀은 상당수가 폭로에 있다.태양신 아폴로가 연인이었던 클리티아를 버리고 아리따운 아시리아의 공주 레우코토에에게 가버리자 클리티아는 아폴로의 계략을 폭로했고,결국 죽음을 당한 레우코토에는 태양을 따라 도는 자색의 아름다운 꽃,헬리오트로프(Heliotrope)로 다시 태어난다.영광의 월계수 나무도 아폴로의 폭로로 죽은 아름다운 처녀 다프네의 화신이다.

그러나 우리도 폭로가 저항의 성격을 갖게되면 단호했다.양기탁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裵說)은 고종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함으로써 일본의 강압적 침략행위를 국내외에 폭로했다.일본의 강제 침탈을 막으려는 자유언론의 저항이었던 것이다.과거 자유당 정권때 김두한 의원의 국회 본회의장 인분 투척사건도 그 본질은 밀수에 대한 폭로였다.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격화된 민주화 투쟁도 독재권력의 만행에 대한 진실 폭로의 산물이다.

요즈음 한나라당 의원들의 잇단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폭로로 정치권이 어수선하다.재미있는 것은 한나라당 내부 논쟁이다.‘폭로 원조’로 불리는 정형근 의원이 동료의원들의 마구잡이 폭로에 ‘폭로도 철학과 도덕·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아마 폭로에도 나름의 급수가 있고,격이 존재한다는 뜻일 게다.이 분야에 일가견을 이룬 ‘장인 의원’의 닳고 닳은 체험에서 나온 ‘훈계’다.

인간사가 계속되는 한 폭로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할 것이다.그래서 폭로없는 정치,세상에 살고 싶은 것은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양승현 논설위원
2003-11-22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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