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환 감독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 코믹·호러·스릴러·SF ‘기묘한 동거’이성·감성 확 깨운다

장준환 감독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 코믹·호러·스릴러·SF ‘기묘한 동거’이성·감성 확 깨운다

입력 2003-03-28 00:00
수정 2003-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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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 여부는 장담할 수 없지만,자신있게 말하건대 ‘지구를 지켜라’(제작 싸이더스·새달 4일 개봉)는 요즘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다. 고만고만한 코미디만이 판을 치는 지금 한국영화판에 꼭 있어야할 영화. 장르·소재·연기 모두 상상을 초월한다. 도대체 어떤 영화냐고?

제목만 보면 황당한 코미디쯤으로 상상할 수 있겠다.뭐 틀린 건 아니다.개기월식 때까지 안드로메다 왕자를 만나지 못하면 지구에 재앙이 몰려올거라 믿는 병구.그는 유제화학의 강만식 사장이 왕자와 접속할 수 있는 ‘로열 분체 교감 유전자’를 지닌 외계인이라 믿고 납치한다.강사장을 의자에 묶은 뒤 외계 교신 수단이라며 머리카락을 빡빡 밀고,때밀이로 발등의 피부를 벗겨 그 위에 물파스를 바른다.

하지만 ‘엽기’고문의 강도가 세지면서 영화는 호러로 무게중심을 옮긴다.‘미친 놈’ 병구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관객은 영화 ‘미저리’에서처럼 스멀스멀 공포 속에 젖어든다.거기다 형사의 집요한 추적이 시작되면서 스릴러의 긴장까지 가세한다.마지막은 팀 버튼도 놀랄 만한 SF로 분위기를 뒤집으며 허를 찌른다.

다양한 장르가 기묘하게 동거하는 영화 속에서 관객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공포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다가 엉뚱한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고,동시에 ‘어떻게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라며 내내 머리를 굴려야 한다.교사의 폭력,노조 탄압 등 미칠 수밖에 없는 병구의 서글픈 과거사가 밝혀지면,뭉클한 감정에 사회비판까지 더해진다.이건 관객 입장에서도 이성과 감성을 총동원해야 하는 도전이다.

‘산만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붙들어맬 것.홍콩 누아르를 연상시키는 청회색빛 화면,독일 표현주의 영화도 저리가라 할 독특한 세트,핸드헬드·스태디 캠 등을 이용한 카메라 등 정교하게 계산된 미술·촬영은 스크린을 일관되게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채색한다.물론 여러 장르를 뒤섞다 보니 내러티브의 짜임새가 촘촘하지는 않지만,지구를 통째로 들고 흔들어대는 자유분방함과 대범함이 모든 약점을 덮고도 남는다.

각각의 위치에 딱 들어맞는 배우들의 연기도 놀랍다.병구역의 신하균은 광기와 순진함의 두 얼굴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했다.병구를 따라다니는 순이 역의 연극배우 출신 황정민은 독특한 목소리로 사랑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는 연기를 보여줬다.

가장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강사장 역의 중견배우 백윤식.점잔을 빼던 중년 남자가 팬티 차림으로 갖은 고문에 괴성을 지르는 모습은 압권이다.

김소연기자 purple@

◆장준환 감독 인터뷰

천재인가 사이코인가.‘지구를 지켜라’로 데뷔한 장준환(사진·33) 감독은 둘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장 감독은,영화를 본 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기자에게 장르 혼합이나 엽기를 의도한 게 아니라면서 “재미있게 웃다가 마지막에 따뜻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덤덤하게 설명했다.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그는 정말 지구인으로 가장한 외계인이 아닐까(?)

가장 궁금한 건 아이디어의 근원지.“어느날 영화잡지에서 ‘안티 디캐프리오’사이트에 관한 기사를 읽었죠.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앞머리를 내린 것이 외계인과 교신을 하려는 거고,여자들을 홀려서 지구를 정복하려 한다는 주장이었어요.” ‘바로 이거다!’하며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마지막에 지구를 터뜨리면서 어떻게 관객이 따뜻함을 느끼길 바란 걸까.“거기에는 분열적인 제 모습이 담겼습니다.마음 한 구석에서 지구를 폭파시키고 싶으면서도,사는 게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있잖아요.조금만 신경쓰면 지구가 폭파되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뭐 그런 생각을 표현한 거죠.”

장 감독이 가장 신경쓴 부분은 패러디.영화에는 ‘길’의 젤소미나,‘2001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유인원,‘양들의 침묵’의 마네킹 이미지가 차용된다.

B급영화를 즐겨보던 팀 버튼,홍콩영화를 비디오로 섭렵하던 쿠엔틴 타란티노가 기발한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듯,그 역시 남의 영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삐딱하면서 독창적인’감독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김소연기자
2003-03-28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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