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을 찾아] 요강

[사라지는 것을 찾아] 요강

심재억 기자 기자
입력 2002-04-13 00:00
수정 2002-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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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림없이 소리만 또렷한 기억입니다.술취해 잠드신 아버님은 꼭두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윗목 방구석에 놓인하얀 사기요강에 시원하게 숙취의 잔재를 방뇨하곤 하셨습니다.

마당에 사륵사륵 함박눈이 쌓이던 그 치웁고 긴 겨울밤.아버님은 그렇게 잊혀지지 않는 지릿하고 명징한 정표 하나제 가슴에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요강.좀 점잖게는 야호(夜壺)니 요분(溺盆)이니 했답니다만 역시 질퍽하고 구수하기로는 ‘요강’이 제격인 것 같습니다.간단히 말해 실내용 변기입니다.

요즘에야 세상이 변해 ‘오강’인지 ‘요강’인지조차도헷갈립니다만 60∼70년대까지만 해도 시집갈 때 놋요강이빠지면 ‘반쪽 혼수’라며 시댁에서 실쭉거릴 정도로 요긴한 혼수 물목이었습니다.

갓 결혼해 신행길 오른 신부의 가마 속에 으레 자리잡고있던 것도 바로 요강이었습니다.친정어머니가 눈물 훔치며요강 속에 앉혀 둔 목화씨는 참으로 그윽한 모정의 징표였고요.무슨 목화씨냐고요.아니 가마탄 새댁이 밖에 사내들즐비한 데 좔좔 소리내며 오줌을 눌 수는 없는 노릇 아니었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참 간단치 않았습니다.‘측간과 처갓집은 멀리 있어야 한다.’고 큰소리 쳐놓고는 아무래도 안되겠던지방에 몰래 큼지막한 질그릇 하나 숨겨들어와 밤새 ‘멀리둔 측간’ 드나드는 수고를 덜었으니,이 얼마나 은근하고천연덕스러운 골계(滑稽)입니까.

돌이켜 보면 요강만큼 우리 삶의 흔적을 많이 함축한 것도흔치 않았습니다. 염치(廉恥)가 중했던지라 낮에는 딴전부리듯 마루 한쪽에 엎어두지만 부엌일 마친 어머니,요강단지를 방구석에 들여놔야 비로소 일과가 끝났습니다.바로 뼈빠지는 노동의 대미(大尾)에 요강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뿐입니까.요강이야말로 가장 솔직하고 그래서 더욱 인간적인 배설의 베이스 캠프였습니다.내 것과 아버지 것,누이것과 엄마 것이 뒤섞여 채마밭의 거름이 되고,시궁 지렁이의 밥이 되는 오줌,그 오줌이 살을 섞는 요강이야말로 우리가 자랑하는 가족애의 알파요,오메가 아니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깜깜한 밤,고의춤을 비집고 요강단지를 달랑 드는 아버님이든,궁둥이 까고 앉는 어머님이든 제게는꿈결에 듣는 ‘그림없는 소리’였지만 거기에는 밝음 속의격식 대신 믿음과 신뢰가 배어 마침내는 혈육의 호패(號牌)가 됐던 것이니까요.

반상이 엄연했던 조선시대에 우라질 양반들 폼잡는다고 유기에 백자·청자는 물론 오동나무통에 옻칠까지 해서 썼는가 하면 ‘요강담사리’라는 전담머슴까지 뒀다지만 거기에지린 오줌 누기는 매한가지였으니 반상이 따로 없는 ‘서로같음’의 철학을 담아낸 요강,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가난한 맞벌이 부부가 다섯살배기 딸과 세살배기 아들을단칸방에 가둬두고 일 나갔다가 불에 둘 모두를 잃은 일이있었습니다. 밖으로 잠겨 깡그리 탄 방에는 애들 먹으라고차려둔 점심상과 요강만 뎅그러니 놓여 있었답니다. 세상이바뀌어 요새는 요강에 이런 기막힌 사연도 담기는구나 싶어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

심재억기자
2002-04-13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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