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학자 리극로(李克魯·1893∼1978) 선생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의 주모자로 함흥 감옥에 투옥돼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은 애국자로 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였다.그 후 오랫동안 남한에서는 그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돼 왔다.기자가 많은 월북 지식인들의 후손들 가운데 특히 리극로 선생의 아들 리억세씨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일제시기 리극로 선생이 지었을 것임이 분명한 ‘억세'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방북취재중 조선고려약기술센터에서 리억세씨(69)를 만났다.그의 직책은 이 센터 자료조사실 실장.그는 “서울에서 온 기자선생들을 만나게 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며 반갑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향에서 온 젊은이들을 보는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름은 리극로 선생께서 지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그런데 사람이 이름처럼 우람해 보이지는 않지요?”솔직히 그랬다.마른 체구에 온화한 미소,부드러운 말씨로 전혀 ‘억세'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리극로 선생이 남북연석회의 참가후 남으로 돌아가지 않으신 배경은?” “당시의 심정을 나중에 말씀하셨는데 왜놈도 못 죽인 김구·여운형 선생을 죽이는 친일파 세상에 대한 환멸과 김일성 장군의 인간적 흡인력이 북에 남기로 결심한 계기가 됐다고 하셨습니다.아버지 말씀에 따라 48년 8월중순에 온 가족이 평양으로 왔습니다” 북은 종전에 ‘동의학'이라 부르던 민족의학의 명칭을 ‘고려의학'으로 바꾸었다.그는 “중국측이 우리의학을 동의학이라 하는데 우리는고려의학이라 불러야지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고려약학이 전공이십니까?” “본래는 합성약(양약) 전공인데 고려약 발전에 기여하고자 중간에고려약으로 돌았습니다.조국전쟁때 인재양성정책에 따라 50∼55년까지 레닌그라드 제약대학에 유학했습니다.” 전쟁때 혼자 해외에 나와 공부하는 게 죄스러워 새벽 2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그 결과 레닌그라드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개교이래 최초의 전과정 5점(all A) 학생이었고 ‘공화국 최초의 제약기사'이기도 했다.북의 ‘약제사'는 우리로 치면 약사이고 ‘제약기사'는 제약 연구진이다.남쪽이 의약분업·한약분쟁 등으로 복잡한 상황에서 북의 고려 의료체계가 궁금했다.
“고려약은 어디서 생산합니까?” “보건성의 약무국이 약 전반을 관장하고 고려약은 고려약 생산관리국에서,신약(양약)은 제약생산관리국에서 생산합니다.” “고려의학에서 의약분업의 형태는?” “병원에서 고려의사가 처방을 내면 고려약제사가 약을 주는데 처방전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먹기 좋고 흡수가 잘 되게 법제를 하는 것이 약제사의 임무입니다.규격화된 고려약들은 약국에서 판매되는데 총 1,500여종중 일상적으로 공급되는 것은 20종 정도입니다.
약국에는 약제사가 있어 문답도 해주는데 중등교육으로 양성된 조제사는 판매만 할수 있습니다.” 리억세 실장은 해방 직후 서울대 의대 교수와 의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해 북에서 초대 보건상을 지낸 이병남 박사의 사위이기도 하다.리 실장의 부인 리원영씨(67)는 신경내과 전문의다.리병남선생의 5남매중 3남매가 의료인이라 했다.
며칠 후 추석이었다.기자는 북의 추석 명절 지내는 모습을 둘러보러 나섰다.아침 일찍 평양인근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갔는데 뜻밖에도리극로 선생 묘소에 성묘하고 있는 리억세 실장 일가와 마주쳤다.리원영 여사는 기자의 손을 잡고 흔들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 아버지 병원이 종로 파고다극장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다 바뀌었겠지요?” 그녀는 파고다극장 옆에 용빈루라는 중국요리점이 있었고,옆에 리병남 소아과가 있었다며 해방직후의 종로2가 모습을 한참 설명했다.기자가 별 신통한 대답을 못해도 리 여사는 남에서 온젊은이들을 만난 것 만으로도 못내 기쁜 듯 했다.
신준영기자 junyoung@
방북취재중 조선고려약기술센터에서 리억세씨(69)를 만났다.그의 직책은 이 센터 자료조사실 실장.그는 “서울에서 온 기자선생들을 만나게 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며 반갑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향에서 온 젊은이들을 보는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름은 리극로 선생께서 지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그런데 사람이 이름처럼 우람해 보이지는 않지요?”솔직히 그랬다.마른 체구에 온화한 미소,부드러운 말씨로 전혀 ‘억세'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리극로 선생이 남북연석회의 참가후 남으로 돌아가지 않으신 배경은?” “당시의 심정을 나중에 말씀하셨는데 왜놈도 못 죽인 김구·여운형 선생을 죽이는 친일파 세상에 대한 환멸과 김일성 장군의 인간적 흡인력이 북에 남기로 결심한 계기가 됐다고 하셨습니다.아버지 말씀에 따라 48년 8월중순에 온 가족이 평양으로 왔습니다” 북은 종전에 ‘동의학'이라 부르던 민족의학의 명칭을 ‘고려의학'으로 바꾸었다.그는 “중국측이 우리의학을 동의학이라 하는데 우리는고려의학이라 불러야지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고려약학이 전공이십니까?” “본래는 합성약(양약) 전공인데 고려약 발전에 기여하고자 중간에고려약으로 돌았습니다.조국전쟁때 인재양성정책에 따라 50∼55년까지 레닌그라드 제약대학에 유학했습니다.” 전쟁때 혼자 해외에 나와 공부하는 게 죄스러워 새벽 2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그 결과 레닌그라드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개교이래 최초의 전과정 5점(all A) 학생이었고 ‘공화국 최초의 제약기사'이기도 했다.북의 ‘약제사'는 우리로 치면 약사이고 ‘제약기사'는 제약 연구진이다.남쪽이 의약분업·한약분쟁 등으로 복잡한 상황에서 북의 고려 의료체계가 궁금했다.
“고려약은 어디서 생산합니까?” “보건성의 약무국이 약 전반을 관장하고 고려약은 고려약 생산관리국에서,신약(양약)은 제약생산관리국에서 생산합니다.” “고려의학에서 의약분업의 형태는?” “병원에서 고려의사가 처방을 내면 고려약제사가 약을 주는데 처방전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먹기 좋고 흡수가 잘 되게 법제를 하는 것이 약제사의 임무입니다.규격화된 고려약들은 약국에서 판매되는데 총 1,500여종중 일상적으로 공급되는 것은 20종 정도입니다.
약국에는 약제사가 있어 문답도 해주는데 중등교육으로 양성된 조제사는 판매만 할수 있습니다.” 리억세 실장은 해방 직후 서울대 의대 교수와 의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해 북에서 초대 보건상을 지낸 이병남 박사의 사위이기도 하다.리 실장의 부인 리원영씨(67)는 신경내과 전문의다.리병남선생의 5남매중 3남매가 의료인이라 했다.
며칠 후 추석이었다.기자는 북의 추석 명절 지내는 모습을 둘러보러 나섰다.아침 일찍 평양인근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갔는데 뜻밖에도리극로 선생 묘소에 성묘하고 있는 리억세 실장 일가와 마주쳤다.리원영 여사는 기자의 손을 잡고 흔들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 아버지 병원이 종로 파고다극장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다 바뀌었겠지요?” 그녀는 파고다극장 옆에 용빈루라는 중국요리점이 있었고,옆에 리병남 소아과가 있었다며 해방직후의 종로2가 모습을 한참 설명했다.기자가 별 신통한 대답을 못해도 리 여사는 남에서 온젊은이들을 만난 것 만으로도 못내 기쁜 듯 했다.
신준영기자 junyoung@
2000-10-07 2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