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역사학계에 묻는다

[특별기고] 역사학계에 묻는다

윤덕한 기자
입력 1999-09-09 00:00
업데이트 1999-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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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어느 서양인 교수가 ‘한국은 역사왜곡이 일상화된 사회’라고 비판한 글을 본 적이 있다.이러한 지적은 대단히 불쾌하고 모욕적인 것이지만 딱부러지게 반박할 수만도 없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그가 말하는 ‘역사왜곡’의 상당 부분은 우리 역사학계의 지나친‘애국심’에서 비롯된다. 애국심에 넘치는 일부 역사 학자들이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고,우리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며,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터무니 없이 미화하거나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얼핏 대단히 애국적인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진실이 아닌 것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없으며,진실이 아닌 것에서 진정한 애국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역사 왜곡은 결코 애국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필자는 ‘이완용평전’을 쓰면서 이 서양인 교수의 지적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수없이 확인했다.

우리역사에서 이완용은 탐욕스럽고 패륜적이며 배은망덕한 인간 말종의 전형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가 술도 마실줄 모르고여자도 밝히지 않았으며 오로지 시문과 서예를 낙으로 삼은 전형적인 조선 선비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덧칠 속에 가려져 왔다.또 그가 독립협회 전체 존속기간의 3분의 2이상 동안 위원장과 회장으로서 사실상 협회를 이끌었으며,학부대신으로서 이 땅에 최초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했다는 사실 역시 우리 역사의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결코 매국노 이완용의 알려지지 않은 애국활동을 들춰내 그를 찬양하자는것이 아니다.매국노라고 해서 ‘며느리와 사통했다느니,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면서 칼을 들이댔다느니’하는 식의 저급하고 근거없는 풍문 수준으로그를 매도만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이완용’이라는 매국노의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의 애국활동은 애국활동대로,매국행위는 매국행위대로 사실대로 기록해야한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한 때의 애국자가 만고의 매국노로 전락하게 된그 비극적 과정과 배경, 변신의 논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작업을 통해서만이 제2의 이완용이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대원군이 일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군졸들을 이끌고 경복궁에 쳐들어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대궐을 장악하자 학부대신 이완용은 그날로 정동의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한다.친러 배일파로서 민비편에 붙어있던 그는 대원군의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이른바 민비시해사건은 당시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의 주도 아래 실행된 것이 사실이지만 사건의 주범은 명백히 대원군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4일전 대원군은 자신의 마포 공덕리 별장 사랑으로 찾아온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한 4개항의각서에 자필로 서명했다.그리고 사건 당일 새벽 3시 대원군은 일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의 별장을 떠나기에 앞서 자신의 거사이유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게 했다.사건이 진행되는동안 그는 경복궁내 강령전에 머물며 난입자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보고까지 받았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의주범이라는 데는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서구국가 외교사절들 사이에도 이론이 없었다.사실 명성황후 시해는 대원군과명성황후의 22년간에 걸친 이성을 잃은 권력투쟁의 종결편이라는 성격을 간과하고는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우리 역사학계는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해 대원군의 역할은 쏙 빼버리고 일본을 비난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이런 식의 역사인식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나는 역사학계에 묻는다.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역사를 왜곡해서 쓰고 가르칠 것인가. 그것이 애국인가. 언제까지‘을사5적’이라는 비이성적인 역사용어를 사용할 것이며, 고종이 을사조약에 ‘끝까지’ 반대했다는 사실과 다른‘신화’를 만들어낼 것인가. 역사학계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분명히 답변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올바른 역사인식의 토대 위에서 건강한 민족사 창조를 위해.

[尹德漢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1999-09-09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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