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起鐸 선생 유해 60년만에 환국

梁起鐸 선생 유해 60년만에 환국

주병철 기자 기자
입력 1998-05-09 00:00
수정 1998-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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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창간·臨政 참여 독립운동/어제 中서 봉환… 14일 국립묘지에 안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대표적인 애국계몽 언론인이자 무장독립운동가인 우강(雩岡) 梁起鐸 선생의 유해가 8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1938년 중국 상소성 율량 고당암에서 서거해 현지에 안장된 지 꼭 60년만이다.

선생의 유해는 이날 하오 3시30분 아시아나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손자 梁俊一씨와 손녀사위 朴維徹(독립기념관장)에 의해 봉환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영현봉안관에 임시 안치됐다.

이로써 李相龍 선생(90년),朴殷植 선생(93년) 등 국외에 안장돼 있던 8명의 임시정부 수반급 요인이 모두 국내로 봉환됐다.雩岡 선생은 민족독립을 위해 몸소 가시밭길을 걸어온 참 민족주의자였다.

평양 소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25세때인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민족운동의 길로 들어섰다.수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는 수난의 시작이었다.

선생은 1904년 영국인 베델과 합작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으며 외국인에게 사장을 맡기면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십분 활용,본격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격렬한 필봉을 휘두르며 을사조약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파기를 요구했다.이와 함께 전국의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항일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이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로 인식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인정받았다.

일제에 맞설 때마다 중심축이 됐던 선생은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대한매일신보사내에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를 설치해 직접 총무를 맡으며 전국적 국민운동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후 安昌浩·李東輝 선생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창립해 활동하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933년 여러 차례에 걸친 추대에 겸양으로 거절하다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조선혁명당 한국광복전선을 조직하는 등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민족화합을 위해 온몸을 던져 일하다 과로로 1938년 이역만리에서 서거했다.유해는 일반인이 참배할 수 있도록 오는 14일 정오까지 영현봉안관에 안치되며 14일 하오 2시 안장식이 거행된다.<朱炳喆 기자>
1998-05-09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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