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이미경(이세기의 인물탐구:146)

서예가 이미경(이세기의 인물탐구:146)

이세기 기자 기자
입력 1997-10-04 00:00
수정 1997-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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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마다 유·절·곡… 궁체의 대가/획과 여백이 미 조화 붓끝에 예술혼 담아/작품 미·캐나다박물관 소장 ‘국제 서도인’

‘멀고 먼 서법의 길/가도가도 끝없어라/지름길 따로 없어/한 골로만 모는 채찍/외로운 발자국마다/내모습이 찍힌다’

한글서예중에서 궁체의 우뚝하고 독보적인 존재인 꽃뜰(하정 이미경)의 시조 ‘서법의 길’ 전문이다.그는 틈틈이 남모르게 써온 시조들을 모아 지난 여름 ‘붓끝에 가락 실어’란 제목으로 시조집을 엮어냈다.서여기인이라면 시·서·화에 능한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서예가의 타이틀로 시조집을 펴낸 것은 아마도 꽃뜰이 처음일 것이다.그의 글씨만큼이나 시조 또한 구절구절 영롱하고 근엄하여 마지막 이조여인의 기개인 ‘양반은 외부의 자극에 함부로 동하지 않는다’는 ‘강류석부전’을 굳건히 지킨다.

○‘붓끝에 가라길어’ 시조지보

꽃뜰은 바로 한글서예에서 갈물체를 이룩한 이철경(전 금란여고 교장)의 친제이다.언니인 갈물과 비슷한 시기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으면서도 결혼생활로 한동안 서단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고 그의 성격이 남앞에 나서기를 꺼려하여 지금까지 신문이나 잡지에 개인적 풍모가 소개된 적도 드물다.그러나 서예계 원로들이 한글서예를 말할때 ‘꽃뜰’을 으뜸으로 점치면서 일중 김충현은 그가 발간하는 ‘서법예술’에다 ‘꽃뜰의 궁체’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표명한 바 있다.‘고통을 인내할줄 아는 한국여성 특유의 자세로 고전을 발굴하여 계승시킨 여사의 궁체는 아담하며 청초하면서도 그 운필은 찬연하고 풍격은 고고하다’고 했다.우선 그의 글씨에서는 ‘향기’가 우러난다.그의 아호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뜨락이기 때문인지 그가 펼치는 글씨는 한다발의 백매나 홍매,어느때는 모란향같은 기품이 은은히 풍겨나온다.

글씨를 쓰는데 있어 한자는 획수가 많은 편이어서 공간처리가 용이하지만 한글은 획수가 적어 여백처리가 난해한 편이다.이른바 그림에 비유한다면 한글서예는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동양화에 비유되고 한자는 화면을 꽉채우는 서양화에 가깝다.그래서 획과 여백의 비중을 똑같이 배분해야만 치졸이 배제된다.여백처리에서 만약 실오라기만한 틈새를 보여도 궁체가 지니는 특징은 삽시에 소멸된다.백낙청이 ‘비파행’에서 비파소리를 ‘은쟁반에 떨어지는 옥구슬’이라고 했듯이 ‘그의 글씨야말로 옥구슬 금구슬을 꿰어낸듯 오색광채를 발한다.글씨가 구슬인 것은 꽃뜰의 글씨를 보면 실감된다’는 평은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다.

특히 이은상의 ‘만폭동팔담가’며 2천여자가 넘는 ‘관동별곡’,동해에서 해뜨는 광경을 보고 쓴 ‘동명일기’ 등은 10곡병풍을 펼치는 순간 문자그대로 ‘보석이 쏟아지는 현란한 현기증’이 느껴진다.글씨마다 흐르고(유) 맺히고(절) 감돌고(곡) 굽이치면서 정자에서 흘림,진흘림과 반흘림이 초성에서 종성까지 반듯하게 대맥을 이어나간다.그리고 어느 글씨를 쓰든 글씨의 결론은 그것이 예술답게 아름답다는 정답을 얻어내고야 만다.시조시인 정완영은 꽃뜰의 서체에 대해 ‘이분은 청산 한나절 넉넉하게 기대앉은 초가삼간처럼 한유해 보이면서도 자강불식의 심락을 누리는 그림같은 분’이라고 했다.

○이화여전땐 피아노 전공

본래 그의집안은 강원도 원주이지만 한성의학교(서울대 의대전신)를 나온 부친 이만규씨가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4녀2남중 위로 세 언니와 오빠는 개성출신이고 부친이 다시 서울 배화학교 부교장에 부임하여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서예를 하게 된 것은 집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편지쓰실때 글줄이 자를 대고 줄친 것처럼 고르게 뻗은 봉서의 흘림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다.성격이 강명한데다 필재가 뛰어난 것을 보고 부친이 붓을 잡고 천자문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14살 되던해 ‘애련설’을 써서 교내습자대회에서 입선하자 더욱이나 글씨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배화학교 졸업후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그의 음악공부가 글씨쓰는 일에 특별한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이른바 문자예술에서 한번 지나간 것은 다시 덧칠하지 않는 일회성,생체리듬과 음악의 리듬같은 율동성으로 작품을 이루는 순간의 서법등이 음악을 이루는 과정과 같은 맥락을 지녔다는 것이다.그러나 대학졸업후 서울공대 출신인 남상인씨(전 서울공대 교수)를 만나 결혼했고 지금의 홍제동한옥에 정착하면서 시할머니(57년 91세로 작고) 시어머니(93년 97세작고)를 모시고 사는 엄격한 시집살이를 감당해왔다.그의 고옥은 초가을인데도 녹음이 창연하고 청결한 한복차림으로 그는 마루에 나앉아 아침나절이나 마음이 움직일때 붓을 잡는다.요즘은 주로 자작시조를 서두로 잡고 있다.

언니인 갈물이 갈물회를 발족한 것은 58년이고 그는 50대에 들어와서야 뒤늦게 서예활동을 시작하여 갈물회 정회원이 된것은 72년이 처음이다.그때 글씨를 회원전에 내놓았고 ‘유독 그 영롱한 필체가 돋보여 뭇시선을 끌었다’고 생전의 갈물이 자랑한 바 있다.

○‘궁체서예의 제일봉’으로

아직도 꼿꼿하고 청청한 그는 ‘한글서예의 우뚝한 존재’임을 극구 부인하면서도 ‘글에 대한 예술성은 10년정도의 서력으로는 인지하기 힘든 경지이며 보통 30년정도의 서력을 길러야만 서예와 서도를 터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그리고 여전히 멈추지 않고 ‘서예의 대가가 시조의 신인’이 되어 ‘서중유시’를 이뤄낸 것이다.한연대가 흘러가면 한사람의명인에 의해 그 시대의 정서가 아로 새겨지듯이 일중은 번뇌를 해탈하는 ‘오도일이관지’에서 따온 ‘일이당‘을 꽃뜰의 당호로 내려주면서 ‘궁체서예 제일봉의 외로움’을 격려해 마지않았다.

무현고금이라고 했던가.‘줄이 없어도 울리는 거문고’처럼 그의 시서 쌍전은 혼탁한 진토속에서도 백옥같은 빛을 발하며 먼 훗날에도 그의 붓끝은 심혼의 절조를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다.

□연보

▲1918년 서울 출생

▲1936년 배화여고 졸업

▲1940년 이화여전 기악과 졸업,미세스 골먼에게 피아노 사사

▲1958년 갈물서회 발족

▲1954∼63년 이화여중 서예강사

▲1970∼74년 서울YWCA 서예반 강사

▲1972년부터 갈물서회 회원전출품

▲1974년부터 갈물회 대표

▲1977년 미국 워싱턴 시카고 LA 샌프란시스코 ‘한글서예’전시

▲1982년부터 신사임당상 수상,한국미술협회 회원

▲1983년 ‘갈물 이철경­꽃뜰 이미경’자매전(캐나다 토론토,미국LA)

▲1986년부터 국제서도회 이사

▲1987년 꽃뜰 이미경 서예전(백악미술관)

▷작품소장◁

‘동유기(동유기)’(예술의 전당)‘만폭동 팔담가(만폭통 팔담가)’(세종대왕 기념관) ‘한국 여성서체’(미국 시애틀박물관)‘오우가’(샌프란시스코 아시아박물관)‘속미인곡’(캐나다 로열박물관)외

▷저서◁

갈물 꽃뜰 공저 한글’(81년) 꽃뜰 이미경 쓴 ‘한글서예’(82년) 이미경 시조집 ‘붓끝에 가락 실어’출간(97년 토방출판사)
1997-10-0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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