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문화인물/단재 신채호선생

이달 문화인물/단재 신채호선생

입력 1994-12-01 00:00
수정 1994-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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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심포지엄·자료전·추모집 발간 등 추진/독립투사·사학자·언론인으로서의 삶 조명

문화체육부는 12월의 문화인물에 단재 신채호선생을 선정했다.

단재는 한평생 일제에 대해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한 독립투사였고 한국사 연구에 힘써 주체적인 민족사관을 확립한 사학자였으며 명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행위를 통렬히 비판한 언론인이었다.

188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같은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언론인의 길을 선택,「황성신문」에 일본의 조선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이 된 선생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일본의 한국사 왜곡에 맞서기 위해 이 신문에 「독사신론」을 연재,「신라침공설」과 「임나부 경영설」 등을 철저히 비판했다.

단재는 1910년 4월 중국 청도에 망명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근업신문」에서 활동하다가 14년에는 조선사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등 우리민족의 옛 터전을 둘러보기도 했다.

19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의정원 의원,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의 대통령 선임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한 뒤 「신대한」이라는 신문을 창간,임정의 노선을 비판했다.

이어 22년 「조선혁명선언」을 발표,민중의 폭력혁명을 통한 독립쟁취를 부르짖었고 27년에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했다.

28년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중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하던중 36년 2월 순국했다.

선생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하고 「조선상고사」를 일간지에 연재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애국의 붓을 놓지 않았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문화사」「조선사론」 등이 있다.

문화체육부는 12월 한달동안 관련단체와 함께 학술 심포지엄과 자료 전시회를 열고 추모집을 발간하는 등 단재의 항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사를 다채롭게 마련한다.<김원홍기자>
1994-12-0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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