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리 구석기유적관」 개관준비로 분주”/주먹도끼복제품 등 여러형태 석기 비교전시/고고학계 치부드러낸 발굴비리 파문엔 우울
『올 한햇동안 우리 고고학계는 전곡리등 몇몇 중요유적발굴과 국제학술대회등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학계의 대외적 위상을 높인 한해임에는 틀림없습니다.그러나 서울대 이선복교수의 발굴비리폭로로 극심한 내부진통도 함께 겪어야 했던 그런해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 고고학계의 내일을 이끌어 나갈 젊은 학자가운데서 구석기분야에 심혈을 기울여온 한양대 배기동교수(42·문화인류학과).그가 짚어본 올 한해 한국고고학계는 바깥세상에 알려진 활동에 비해 내부사정은 밝지 않았다고 자평한다.
실제 우리 고고학계는 올해 미사리,전곡리,금파리등 우리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한눈에 가늠할 주거지를 파헤치는 대규모 발굴작업으로 커다란 학술적 성과를 거두었다.또 황해문화권학회,동아시아의 구석기문화,가야학회등 각종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서구는 물론 소련,중국,일본등 인접국가와의 활발한 의견및 자료교환을 일궈낸 주목할만한 1년이었다.그러나 올봄 주간지에 폭로된 발굴비리보도로 인해 전체 고고학계와 발굴현장전반이 침체에 빠지고 외부로 부터 손가락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고고학자는 모두 도둑놈이라고 해도 문화재보존은 우리 민족의 명제입니다.발굴비리폭로는 우리의 곪은 환부를 있는 그대로 국민앞에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자성과 개선의 채찍질로 받아들여야할 문제이기도 했습니다.그러나 발굴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나쁘게 만들어 유물의 보존,발굴에 제약요인으로 작용하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김원룡윤무병,한병삼임효재·김병모·최몽룡등으로 내려온 한국고고학계학통 4세대를 잇는 대표적 소장학자.서울대고고인류학과와 대학원석사과정을거쳐 미국 버클리캘리포나아대학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뒤 4년전 한국에 돌아와 의욕적으로 연구와 발굴현장을 뛰어 다녔다.한국인으로서 첫 조사자로 그가 발굴에 참가한 전곡리유적은 역사교과서 첫페이지에 가장 오래된 구석기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적지를 파헤치는 고고학자의 발굴작업에는 도덕적 책임도 따른다고 생각합니다.전곡리유적지의 경우 지명으로만 유명한 곳이 아니라 실제 이곳에 이런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역주민들과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지난79년 첫 발굴당시 쓰이던 26평짜리 가건물을 활용해 「전곡리구석기유적관」을 꾸미고 있다.애초 사비를 들여 시작한 작업을 주위에서 알고 도와준 덕분에 내년 봄개관을 목표로 요즘 마무리작업이 한참이다.이곳에는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의 복제품을 비롯,여러가지 석기가 비교 전시된다.또 구석기문화의 발달사,전곡리유적의 연대,형성과정,발굴경과등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우리 고고학계가 연구및 자료정리작업은 등한히 한채 발굴에만 너무 매달린다는 일부의 지적이 많습니다』
이 말속에는 그가 혼자 뛰어 지금 세우고 있는 「전곡리 구석기유적관」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노주석기자>
『올 한햇동안 우리 고고학계는 전곡리등 몇몇 중요유적발굴과 국제학술대회등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학계의 대외적 위상을 높인 한해임에는 틀림없습니다.그러나 서울대 이선복교수의 발굴비리폭로로 극심한 내부진통도 함께 겪어야 했던 그런해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 고고학계의 내일을 이끌어 나갈 젊은 학자가운데서 구석기분야에 심혈을 기울여온 한양대 배기동교수(42·문화인류학과).그가 짚어본 올 한해 한국고고학계는 바깥세상에 알려진 활동에 비해 내부사정은 밝지 않았다고 자평한다.
실제 우리 고고학계는 올해 미사리,전곡리,금파리등 우리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한눈에 가늠할 주거지를 파헤치는 대규모 발굴작업으로 커다란 학술적 성과를 거두었다.또 황해문화권학회,동아시아의 구석기문화,가야학회등 각종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서구는 물론 소련,중국,일본등 인접국가와의 활발한 의견및 자료교환을 일궈낸 주목할만한 1년이었다.그러나 올봄 주간지에 폭로된 발굴비리보도로 인해 전체 고고학계와 발굴현장전반이 침체에 빠지고 외부로 부터 손가락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고고학자는 모두 도둑놈이라고 해도 문화재보존은 우리 민족의 명제입니다.발굴비리폭로는 우리의 곪은 환부를 있는 그대로 국민앞에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자성과 개선의 채찍질로 받아들여야할 문제이기도 했습니다.그러나 발굴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나쁘게 만들어 유물의 보존,발굴에 제약요인으로 작용하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김원룡윤무병,한병삼임효재·김병모·최몽룡등으로 내려온 한국고고학계학통 4세대를 잇는 대표적 소장학자.서울대고고인류학과와 대학원석사과정을거쳐 미국 버클리캘리포나아대학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뒤 4년전 한국에 돌아와 의욕적으로 연구와 발굴현장을 뛰어 다녔다.한국인으로서 첫 조사자로 그가 발굴에 참가한 전곡리유적은 역사교과서 첫페이지에 가장 오래된 구석기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적지를 파헤치는 고고학자의 발굴작업에는 도덕적 책임도 따른다고 생각합니다.전곡리유적지의 경우 지명으로만 유명한 곳이 아니라 실제 이곳에 이런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역주민들과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지난79년 첫 발굴당시 쓰이던 26평짜리 가건물을 활용해 「전곡리구석기유적관」을 꾸미고 있다.애초 사비를 들여 시작한 작업을 주위에서 알고 도와준 덕분에 내년 봄개관을 목표로 요즘 마무리작업이 한참이다.이곳에는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의 복제품을 비롯,여러가지 석기가 비교 전시된다.또 구석기문화의 발달사,전곡리유적의 연대,형성과정,발굴경과등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우리 고고학계가 연구및 자료정리작업은 등한히 한채 발굴에만 너무 매달린다는 일부의 지적이 많습니다』
이 말속에는 그가 혼자 뛰어 지금 세우고 있는 「전곡리 구석기유적관」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노주석기자>
1992-12-16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