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슈켄트 한인들의「위대한 삶」(본사 송정숙 논설위원 현지탐방:상)

타슈켄트 한인들의「위대한 삶」(본사 송정숙 논설위원 현지탐방:상)

송정숙 기자 기자
입력 1991-08-04 00:00
수정 1991-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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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일군 「콜호즈」는 타민족의 귀감/만나는 동포마다 “서울 한번 가보고 싶소”/「황성옛터」 부를땐 백발노인 몸떨며 통곡

『나의 조국,대한민국을 사랑하리.영원토록 사랑하리…』

4천석의 좌석은 물론,입석까지 그득히 메운 「레닌인민궁전」극장에서 한국의 가수 태진아는 「사랑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기쁨에 차서 목청껏 불렀다.이틀 연속 공연으로 연인원 1만명이 동원된 관객들은 노래마다 박수로 장단을 맞췄고 무대마다 긴 갈채로 화답을 보냈다.

MBC가 기획한 「중앙아시아의 우리 동포를 찾아서」의 타슈켄트공연.레닌동상이 광장마다 서있고 사회주의식 구호가 붉은글씨로 여기저기 붙어있는 이 멀고먼 중앙아시아땅에서 우리의 가수 코미디언들의 공연이 이토록 성황속에 이뤄지고 있다는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웃기기 잘하는 가수 김상국씨가 「황성옛터」를 부르던 마이크를 들이댔을때 객석에 앉아있던 성이 「짐가」라는 백발의 노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통곡을 했다.쉽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을 것처럼 앉아있던 이 「고려사람」은 「원동」으로부터 그 악몽의 「강제이주」를 당해온 당세대의 한인이다.이곳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모두가 그때의 당사자거나 그 2세거나 3세였다.

타슈켄트는 소연방 15개 공화국중의 하나인 우즈베크 공화국의 수도다.이 공화국에만 「고려사람」 20만명이 산다.수도 타슈켄트시에만도 5만명이 살고 있다.그들은 애당초 「유랑하는 가축」처럼 살길을 찾아 모국땅을 떠나온 한인들이었다.1900년대 초기부터 부지런하고 쌀농사 재능이 뛰어났던 그들은 혁명러시아의 토지법에 의해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그많은 악조건을 물리치고 성공적인 정착을 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7년 9월,그들은 아직도 확연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스탈린의 음모에 의해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농사도 몽땅 버리고 다시 「가축」같은 신세가 되어 화차에 실린채 맨몸으로 서른날씩 마흔날씩 걸려 이곳 중앙아시아로 실려와 염분섞인 땅,갈대만 우거진 늪지대에 던져졌었다.지금의 중앙아시아에 사는 35만명은 그들과 그 자손들이다.

「치모페이」「웬체슬로바」「와렌티나」「보리스코프」…소련식 이름을 단 그들 「카레이스키」(한국인)2,3세들은 토굴을 짓고 산 할아버지 이야기,고사리와 미나리죽으로 봄기근을 이겨준 할머니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각각의 가슴속에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금 중앙아시아의 한국인들은 숱하게 많은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한결같이 잘살고 있다.타슈켄트에서도 사마르칸트에서도 알마아타 푸른제에서도 영특하고 지혜롭게 잘살고 웬만한 집에서는 다 아들 딸 모두들 대핵고(대학교)까지 필업(졸업)시켰고 도시의 직장에 진출시켰다.

이유없이 「적성민주」의 딱지를 붙여 공민권을 빼앗고 이주의 자유도 여행의 자유도,친척끼리 모여 사는 일도 허락받지 못했던 시기에도 그들은 사막땅을 일궈 쌀농사를 짓고 목화를 심어 혁명러시아가 산업화해가는데 원자재를 대고 전쟁중에는 인민의 식량을 보탰다.1%도 안되는 소수민족의 신분으로 이만큼 공헌한 사람들은 카레이스키(고려인)들 말고는 없을 것이다.

타슈켄트의 도심을 벗어나면 포리토구역에 잘사는 한인 콜호즈(집단농장)가 있다.많은 사람들이 이 성공적인 콜호즈를 찾아온다.2만1천명이 일하는데 그중 조선인은 4천명밖에 안된다.그래도 이 농장은 「한인콜호즈」로 불린다.애당초 이 농장은 강제이주된 조선인들만으로 만들어졌던 집단농장이다.그들의 「일 좋아하고 부지런한」특성때문에 벼농사 삼베농사 목화농사를 성공적으로 이뤄내 타민족보다 부유해졌다.그러자 1951년 소련정부는 그들을 타민족의 콜호즈와 병합시켜 버렸다.말하자면 가난한 콜호즈와 병합시켜 하향 평준화시킨 것이다.능력없는 민족까지 이끌고 발전시키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콜호즈의 한인마을에는 전용회관이 있다.러시아어간판 옆에 「어서 오십시요」라는 간판도 붙여 놓았다.우리 일행이 찾아갔을 때는 전속 가무단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어린이들이 꼭두각시춤도 추고 아주머니들이 우리말 노래도 불렀다.2∼3년에 한번쯤 평양에서 「선생님」을 모셔다가 지도를 받아오는정도이고 스스로 엮어가는 가무단이라 가무가 약간 국적불명이긴 하다.

박이나겐치부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지난해 이 농장의소득은 농사지은 것 모두에 대해 국가가 수매해준 대금 1천7백80만루블이었다.배당하는 방법은 1인당 월급을 2백70∼3백루블씩 받고 그 나머지분을 배당금으로 나누게 된다.지난해에는 1인당 1년에 8천루블쯤 돌아갔다.노동자 평균임금이 월2백50루블이고 고급층 월급이 5백루블이상인 그나라 수준으로는 높은 소득이었다.

소득이 그만못한 또다른 솔호즈(국영농)로 우리를 안내해준 사람은 보리스라브 강씨였다.타슈켄트의 한인문화센터 일을 맡고 있는 건축설계 전문가다.40대초반인 그 역시 「37년 강제이주」한 고려인 2세이고 솔호즈에서 자랐다.그가 자란 곳인 솔호즈 근처에는 「강우주거리」라는 길이 있다.강우주는 바로 그의 아버지라고 한다.15년동안 솔호즈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공헌한 것을 평가받아 거리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솔호즈에 이를 무렵,한집안에서 흥겹게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중앙아시아식 경쾌한 음악에 맞춰 우즈베크계의 농민들이 춤추고 있었다.아마도 그들 민족 전통방식의 결혼식이 있는가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그 집의조그만 아들형제가 할례를 받아 그 잔치를 벌인 것이라고 했다.솔호즈 유지자격으로 한인회장도 참석하고 있었다.

예고없이 찾아든 한국인 여행객을 정도이상 반기면서 음식을 안기고 연설을 해라,춤을 춰라 하며 놓아주지 않았다.한인회장도 「시늉이라도 해야」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요령을 일러주었다.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올 때에는 아이들의 큰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친척들이 줄줄이 한참동안을 따라 나왔다.그중의 할아버지뻘인 우즈베크노인 하나는 술에 취한채 조선말로 『우리집에 갑세…』를 연신 외쳤다.그 사회에서의 한국인 위치가 지도자적인 자리임을 느끼게 해주는 분위기였다.

공민권도 뺏고 삶의 터전도 뺏고 어느날 느닷없이 「적성민주」이라는 딱지까지 붙여 열사의 사막 한복판에 실어다 버린 형국이었던 「카레이스키」들이 반세기가 지난뒤 그 선혈섞인 땀으로 이뤄낸 오늘의 위치는 위대한 것이라고 말해서 전혀 과장된게 아니다.

거기다가 새로 떠오르기 시작한 고국 「한국」은 중앙아시아의 몇개 공화국에 사는 「강제이주된 고려사람들」의 지위를 점점 더 높여주고 있다.그래서 만나는 동포마다 은근한 목소리로 『서울에 한번 기차게 가보고 싶소』라고 말한다.
1991-08-04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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