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곤(金鍾坤)제독은 한국전쟁때 PT어뢰정을 타고 동.서.남해안으로 종횡무진 누볐다.당시 해군은 미해군으로부터 PT어뢰정4척을 인수받았다.이중 한척은 제2차세계대전때 케네디 대통령이 해군중위로 승선,명성을 날렸던 것이었다.
PT어뢰정은 양쪽 배 옆구리부분에 어뢰를 장착한 32t급 고속정으로 로켓포와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했다. 따라서 적함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해상에서육상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는 다목적 공격용 어뢰정이었다.
김제독은 PT어뢰정 정비대장을 맡고 활약하던 53년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버지니아의 ‘해군수리창’에서 보다 전문적인 정비지식 등을 쌓기 위해서였다.6개월동안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것은 휴전 직후였다.원대복귀한그는 이듬해 대위로 진급,어뢰정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계속 어뢰정과 인연을 맺다가 소령때 어뢰편대장을 끝으로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어뢰정 곁을 떠났다.또다른 함정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해군에서의 ‘영관급’은 가장 중요한 시기.소.중.대형의 함정 승선을 모두경험해야 하고 또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할 때가 바로 영관급장교 시절이다.
대개 이때의 활동기록을 토대로 장차 ‘별’을 달 수 있는 자격여부를 가늠하게 된다.김제독은 순리대로 소령때 소형 상륙함인 61함장을,중령때는 중형경비함인 53함장을 각각 맡았다.대령진급 후에는 호위구축함장(72함)이 되었다.
이무렵(65년) 우리 해군은 미해군으로부터 전투용 구축함 1척을 인수받았다.당시 정규 구축함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김제독은 운이 좋게도 이 최신예 구축함장(91함)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듣던 대로 91함은 5인치포 5문을 비롯,수중음파탐지기 등 당시로는 최첨단장비로 무장한 구축함이었다. 김제독의 회고.
당시 해군의 수준은 대간첩작전을 수행하는 정도에 불과했다.이때 간첩선침투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성능좋은 북한의 간첩선을 나포하기가 여간 쉽지않았다.우리 해군은 대부분 2차대전때 사용했던 미함정을 보유하고 있었다.간첩선은 시속 32노트의 고속정으로 우리 함정의 속도(시속 15노트)로는 따라잡기가 불가능했다.
특히 간첩선은 대개 야간에 침투하게 마련인데 이를 포착할 만한 전자장비등을 갖춘 함정이 거의 없었다.이런 가운데 91함의 배치는 그나마 위안이 될수 있었다…””
91함에 승선,남해안을 초계중이던 김제독은 67년 1월 어느 날 뜻하지 않은사고소식을 들었다. 동해안 경비임무를 마치고 진해로 귀환중인 충남호(호위구축함)가 진해만 가덕도 부근에서 여객선 한일호와 충돌하는 엄청난 사고가발생했다.
이 사고로 여객선은 침몰했고 승객 88명이 익사했다.당시 국내 보도진들이가덕도에 몰려들어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김영관(金榮寬)해군참모총장이 가덕도에서 직접 선체 인양작업을 현장지휘하는 등 국내의 관심은 온통 가덕도로 쏠려 있었다.
1월19일.’한일호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째였다. 가덕도 인근해상에서 초계중이던 91함에 긴급전문이 날아들었다.발신지는 해군 56함정이었다.’SOS, 적육상포대에서 쏜 포탄을 맞고 현재 아군함정 침몰중.북한의 장전지역에서 쏘아댄 것 같다’
이 긴급타전은 성능좋은 91함에 의해 처음 포착됐다.위급상황이었다. 이것은 분명 적의 도발행위였다.때마침 가덕도에 김영관 해군총장이 있던터라 김제독은 91함의 연락보트를 타고 가덕도 현장으로 달렸다.
김총장은 사고현장에서 한일호 인양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아직 한일호는 인양되지 않은 상태였다.김제독은 망설일 겨를도 없었다. 56함으로부터입수된 전문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뜻밖의 보고를 받은 김총장은 매우 당황했다.한일호가 문제가 아니었다.도발행위를 어떻게 응징할 것인지 분노에 가득찼다.
곧 침착을 되찾은 김총장은 “”91함에 기름이 충분하느냐””고 김제독에게 물었다.때마침 91함의 연료는 충분했다. 김총장은 김제독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자신이 직접 동승하겠다고 거듭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잠시후 김총장이 현장을 뜨려하자 기자들이 달려들어 이유를 물었다. 김총장은 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김제독도 자세한 상황은말할 수 없지만 위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다. 정 못믿겠다면 따라와도 좋다고부연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한일호 인양문제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다””고 말하며 나서기를 꺼려했다.김총장과 김제독이 막 보트에타려는 순간,모신문사 기자 한명이 따라왔다.같이 가겠다는 것이었다.김제독은 김총장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김총장은 “”괜찮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91함에는 김총장과 기자 한사람이 동승했다. 91함은 전속력으로 북상했다.동승한 기자가 자초지종을 알게 된 것도 바로이때였다.91함이 부산 앞바다를 돌아 동해안으로 접어들자 모든 장병들에게긴급 전투태세 명령이 하달됐다.김제독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각오였다.
미해군사령부에서는 이러한 분위기를 간파했음인지 성급한 행동을 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메시지를 2차에 걸쳐 91함으로 타전해 왔다.만약 적에게 함포사격을 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91함이 현장에 당도했다.이미 56함은 침몰된 상태였다.마침 인근해역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중이던 다른 함정이 와 있었다.91함의 장병들은 시신을 찾는데 주력했다.이 사이 김제독은 초계함의 장교를 만났다.
장교는 카메라 필름을 꺼내보이며 침몰당시 찍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제독은 이를 받아 김총장한테 건네줬다.이때였다.동승했던 기자가 필림을 달라며달려들었다. 기자는 끈질기게 필림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김총장은 귀찮았는지 김제독에게 주라는 시늉을 했다.
결국 필름을 얻은 기자는 주문진 항구에 잠시 도착하자마자 하선한 뒤 필름을 서울로 보냈다.이튿날 아침 모신문은 1면 톱기사로 56함의 격침 장면을다뤘다.대특종이었다.사진은 적포탄에 의해 침몰되는 생생한 장면이었다.
그러자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이 밤중에 해군총장 공관까지 쳐들어와 “”어떻게 특정신문만 사진을 줄 수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김제독의 회고.
“”당시는 정말 일전을 불사한다는 생각이었다.한일호 사건으로 해군의 명예가 실추된데다 56함의 피격 침몰로 인해 해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강력한 응징을 하고 싶었다.하지만 미해군사령부의 몇차례에 걸친 당부전문을 받고 포기하고 말았다…””
며칠후 김제독은 휴식시간을 갖게 됐다. 동해안 작전을 나가기에 앞서 91함의 정비를 위해 잠시 진해항에 입항했던 것이었다.그러나 김제독은 쉬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해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어떻게 해서든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다.
김제독은 함대사령관을 만나 다시 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 한가하게 있는 것보다 간첩선이라도 잡고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김제독은 마침 어떤 강렬한 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왠지 간첩선을 꼭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김제독은 다시 출항했다.5일후에는 동해안경비사령부 훈련 지원을 감안,동해안쪽으로 향했다.91함은 단지 간첩선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기약없이 동해바다를 헤맸다. 그러나 간첩선이 쉽게 나타나줄 리가 없었다.
하루가 지났다.김제독은 배를 독도쪽으로 돌렸다.그는 전 장병들에게 간첩선을 처음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현상금 1만원(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이 3천600원)을 주겠노라고 약속하며 간첩선 잡는 일을 독려했다.
김제독은 간첩선이 주로 야간에 침투한다는 점을 감안,낮보다는 밤에 더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장병들에게 환기시켰다.91함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왕래했다. 밤에는 등화관제한 상태에서 조용히 항해했다.
그러나 4일째가 되도록 간첩선은 보이지 않았다.김제독은 초조했다. 이제하루만 지나면 훈련에 합류하기 위해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이날 저녁 8시무렵이었다.울릉도 근해에 머물고 있던 91함이 막귀환하려는 찰나,레이더에 괴선박 한척이 포착됐다.
함장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김제독은 얼른 레이더실로 달려갔다.레이더에 포착된 괴선박은 시속 19노트 속력으로 북쪽에서 남하하고 있었다. 또 괴선박은 우리 오징어잡이 어선들이 모여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김제독은 틀림없는 간첩선이라고 판단했다. 우리 어선들은 10노트 이상 속력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김제독은 괴선박이 어선들과 섞이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한 뒤 나포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91함은 불을 끈채 조용히 괴선박쪽으로 접근했다.김제독은 상부에다 긴급 타전했다.’괴선박 추적중.간첩선으로 보임’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밤바람만 파도를 하얗게 출렁일 뿐이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간첩선이 자신앞에 나타나준 것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간첩선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다만 배의 움직임을 레이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괴선박이 독도쪽으로 선수를 돌렸다.속력도시속 27노트로 올렸다.김제독은 91함의 정체가 간첩선에게 노출된 것으로 판단했다.
91함 역시 같은 속력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20분쯤 지났을까.괴선박이 원산방향으로 선수를 돌렸다.북한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었다.
김제독은 더이상 망설일 수 없다고 판단,지체없이 함포사격을 명령했다.대신 명중시키지 말고 선수 앞쪽 50m지점에 쏘아대라고 했다. 되도록 생포해보려는 것이 김제독의 속셈이었다.
포탄 몇발을 쏘아대도 간첩선은 계속 달렸다.속력을 32노트로 올렸다.간첩선의 최고속력이었다.91함도 속력를 최대로 증가시켰다.다행히 91함은 간첩선보다 1노트 가량 속력이 앞섰다.
잠시후 91함은 3천400m까지 접근했다.그때야 비로소 간첩선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제독은 5인치 함포뿐만 아니라 40mm 기관총까지 풀가동,간첩선을 격침시키라고 명령했다.더이상 지체했다가는 북한 영해로 도망가버릴것 같았다.간첩선에서도 기습적으로 응사해왔다. 총탄으로 봐서 20mm기관총이었다.갑판에 있던 아군 장교와 사병 한명이 적 총탄에 맞았다.
그러는 사이 간첩선은 북한 영해근처까지 도주하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91함은 전속력으로 달려 간첩선 앞쪽을 가로막았다.그러자 간첩선은 선수를 반대쪽으로 휙하고 돌렸다.91함과는 불과 40m 거리였다.
이때였다.5인치 함포가 간첩선의 후미부분을 겨냥했다.드디어 조준선에 들어왔다.’꽈꽝’하고 함포에서 불을 뿜었다.순간 간첩선에서 검붉은 화염이 솟아올랐다.명중이었다.
함포사격도 멈췄다.주위도 잠잠했다.김제독은 보트를 띄웠다. 무장병력 몇명을 데리고 간첩선쪽으로 접근했다. 선미는 이미 침몰중이고 선수부분만 물위로 뾰족하게 나와 있었다.잠수정과 항해용구 등이 물위에 떠 있었다. 시신은 보이지 앉았다.
김제독은 간첩선을 예인하기 위해 줄을 매달도록 했다.그런데 선체가 이내침몰하는 바람에 예인에 실패하고 말았다.모든 상황이 끝났다.이같은 사실을상부에 타전했다.
김제독은 잠수정 등 간첩선 증거물을 챙긴 채 진해쪽으로 향했다.부상자가있어 훈련에 참가하는 것을 보류한 채 전속력으로 달렸다.진해로 돌아온 김제독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TV 등 언론매체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한일호 사건 등으로 실추된 해군의 명예를 어느 정도 만회한 셈이었다.”””
PT어뢰정은 양쪽 배 옆구리부분에 어뢰를 장착한 32t급 고속정으로 로켓포와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했다. 따라서 적함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해상에서육상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는 다목적 공격용 어뢰정이었다.
김제독은 PT어뢰정 정비대장을 맡고 활약하던 53년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버지니아의 ‘해군수리창’에서 보다 전문적인 정비지식 등을 쌓기 위해서였다.6개월동안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것은 휴전 직후였다.원대복귀한그는 이듬해 대위로 진급,어뢰정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계속 어뢰정과 인연을 맺다가 소령때 어뢰편대장을 끝으로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어뢰정 곁을 떠났다.또다른 함정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해군에서의 ‘영관급’은 가장 중요한 시기.소.중.대형의 함정 승선을 모두경험해야 하고 또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할 때가 바로 영관급장교 시절이다.
대개 이때의 활동기록을 토대로 장차 ‘별’을 달 수 있는 자격여부를 가늠하게 된다.김제독은 순리대로 소령때 소형 상륙함인 61함장을,중령때는 중형경비함인 53함장을 각각 맡았다.대령진급 후에는 호위구축함장(72함)이 되었다.
이무렵(65년) 우리 해군은 미해군으로부터 전투용 구축함 1척을 인수받았다.당시 정규 구축함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김제독은 운이 좋게도 이 최신예 구축함장(91함)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듣던 대로 91함은 5인치포 5문을 비롯,수중음파탐지기 등 당시로는 최첨단장비로 무장한 구축함이었다. 김제독의 회고.
당시 해군의 수준은 대간첩작전을 수행하는 정도에 불과했다.이때 간첩선침투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성능좋은 북한의 간첩선을 나포하기가 여간 쉽지않았다.우리 해군은 대부분 2차대전때 사용했던 미함정을 보유하고 있었다.간첩선은 시속 32노트의 고속정으로 우리 함정의 속도(시속 15노트)로는 따라잡기가 불가능했다.
특히 간첩선은 대개 야간에 침투하게 마련인데 이를 포착할 만한 전자장비등을 갖춘 함정이 거의 없었다.이런 가운데 91함의 배치는 그나마 위안이 될수 있었다…””
91함에 승선,남해안을 초계중이던 김제독은 67년 1월 어느 날 뜻하지 않은사고소식을 들었다. 동해안 경비임무를 마치고 진해로 귀환중인 충남호(호위구축함)가 진해만 가덕도 부근에서 여객선 한일호와 충돌하는 엄청난 사고가발생했다.
이 사고로 여객선은 침몰했고 승객 88명이 익사했다.당시 국내 보도진들이가덕도에 몰려들어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김영관(金榮寬)해군참모총장이 가덕도에서 직접 선체 인양작업을 현장지휘하는 등 국내의 관심은 온통 가덕도로 쏠려 있었다.
1월19일.’한일호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째였다. 가덕도 인근해상에서 초계중이던 91함에 긴급전문이 날아들었다.발신지는 해군 56함정이었다.’SOS, 적육상포대에서 쏜 포탄을 맞고 현재 아군함정 침몰중.북한의 장전지역에서 쏘아댄 것 같다’
이 긴급타전은 성능좋은 91함에 의해 처음 포착됐다.위급상황이었다. 이것은 분명 적의 도발행위였다.때마침 가덕도에 김영관 해군총장이 있던터라 김제독은 91함의 연락보트를 타고 가덕도 현장으로 달렸다.
김총장은 사고현장에서 한일호 인양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아직 한일호는 인양되지 않은 상태였다.김제독은 망설일 겨를도 없었다. 56함으로부터입수된 전문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뜻밖의 보고를 받은 김총장은 매우 당황했다.한일호가 문제가 아니었다.도발행위를 어떻게 응징할 것인지 분노에 가득찼다.
곧 침착을 되찾은 김총장은 “”91함에 기름이 충분하느냐””고 김제독에게 물었다.때마침 91함의 연료는 충분했다. 김총장은 김제독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자신이 직접 동승하겠다고 거듭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잠시후 김총장이 현장을 뜨려하자 기자들이 달려들어 이유를 물었다. 김총장은 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김제독도 자세한 상황은말할 수 없지만 위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다. 정 못믿겠다면 따라와도 좋다고부연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한일호 인양문제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다””고 말하며 나서기를 꺼려했다.김총장과 김제독이 막 보트에타려는 순간,모신문사 기자 한명이 따라왔다.같이 가겠다는 것이었다.김제독은 김총장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김총장은 “”괜찮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91함에는 김총장과 기자 한사람이 동승했다. 91함은 전속력으로 북상했다.동승한 기자가 자초지종을 알게 된 것도 바로이때였다.91함이 부산 앞바다를 돌아 동해안으로 접어들자 모든 장병들에게긴급 전투태세 명령이 하달됐다.김제독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각오였다.
미해군사령부에서는 이러한 분위기를 간파했음인지 성급한 행동을 하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메시지를 2차에 걸쳐 91함으로 타전해 왔다.만약 적에게 함포사격을 가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91함이 현장에 당도했다.이미 56함은 침몰된 상태였다.마침 인근해역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중이던 다른 함정이 와 있었다.91함의 장병들은 시신을 찾는데 주력했다.이 사이 김제독은 초계함의 장교를 만났다.
장교는 카메라 필름을 꺼내보이며 침몰당시 찍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제독은 이를 받아 김총장한테 건네줬다.이때였다.동승했던 기자가 필림을 달라며달려들었다. 기자는 끈질기게 필림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김총장은 귀찮았는지 김제독에게 주라는 시늉을 했다.
결국 필름을 얻은 기자는 주문진 항구에 잠시 도착하자마자 하선한 뒤 필름을 서울로 보냈다.이튿날 아침 모신문은 1면 톱기사로 56함의 격침 장면을다뤘다.대특종이었다.사진은 적포탄에 의해 침몰되는 생생한 장면이었다.
그러자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이 밤중에 해군총장 공관까지 쳐들어와 “”어떻게 특정신문만 사진을 줄 수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김제독의 회고.
“”당시는 정말 일전을 불사한다는 생각이었다.한일호 사건으로 해군의 명예가 실추된데다 56함의 피격 침몰로 인해 해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강력한 응징을 하고 싶었다.하지만 미해군사령부의 몇차례에 걸친 당부전문을 받고 포기하고 말았다…””
며칠후 김제독은 휴식시간을 갖게 됐다. 동해안 작전을 나가기에 앞서 91함의 정비를 위해 잠시 진해항에 입항했던 것이었다.그러나 김제독은 쉬고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해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어떻게 해서든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다.
김제독은 함대사령관을 만나 다시 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 한가하게 있는 것보다 간첩선이라도 잡고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김제독은 마침 어떤 강렬한 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왠지 간첩선을 꼭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김제독은 다시 출항했다.5일후에는 동해안경비사령부 훈련 지원을 감안,동해안쪽으로 향했다.91함은 단지 간첩선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기약없이 동해바다를 헤맸다. 그러나 간첩선이 쉽게 나타나줄 리가 없었다.
하루가 지났다.김제독은 배를 독도쪽으로 돌렸다.그는 전 장병들에게 간첩선을 처음 발견하는 사람에게는 현상금 1만원(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이 3천600원)을 주겠노라고 약속하며 간첩선 잡는 일을 독려했다.
김제독은 간첩선이 주로 야간에 침투한다는 점을 감안,낮보다는 밤에 더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장병들에게 환기시켰다.91함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왕래했다. 밤에는 등화관제한 상태에서 조용히 항해했다.
그러나 4일째가 되도록 간첩선은 보이지 않았다.김제독은 초조했다. 이제하루만 지나면 훈련에 합류하기 위해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이날 저녁 8시무렵이었다.울릉도 근해에 머물고 있던 91함이 막귀환하려는 찰나,레이더에 괴선박 한척이 포착됐다.
함장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김제독은 얼른 레이더실로 달려갔다.레이더에 포착된 괴선박은 시속 19노트 속력으로 북쪽에서 남하하고 있었다. 또 괴선박은 우리 오징어잡이 어선들이 모여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김제독은 틀림없는 간첩선이라고 판단했다. 우리 어선들은 10노트 이상 속력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김제독은 괴선박이 어선들과 섞이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한 뒤 나포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91함은 불을 끈채 조용히 괴선박쪽으로 접근했다.김제독은 상부에다 긴급 타전했다.’괴선박 추적중.간첩선으로 보임’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밤바람만 파도를 하얗게 출렁일 뿐이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간첩선이 자신앞에 나타나준 것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간첩선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다만 배의 움직임을 레이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괴선박이 독도쪽으로 선수를 돌렸다.속력도시속 27노트로 올렸다.김제독은 91함의 정체가 간첩선에게 노출된 것으로 판단했다.
91함 역시 같은 속력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20분쯤 지났을까.괴선박이 원산방향으로 선수를 돌렸다.북한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었다.
김제독은 더이상 망설일 수 없다고 판단,지체없이 함포사격을 명령했다.대신 명중시키지 말고 선수 앞쪽 50m지점에 쏘아대라고 했다. 되도록 생포해보려는 것이 김제독의 속셈이었다.
포탄 몇발을 쏘아대도 간첩선은 계속 달렸다.속력을 32노트로 올렸다.간첩선의 최고속력이었다.91함도 속력를 최대로 증가시켰다.다행히 91함은 간첩선보다 1노트 가량 속력이 앞섰다.
잠시후 91함은 3천400m까지 접근했다.그때야 비로소 간첩선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제독은 5인치 함포뿐만 아니라 40mm 기관총까지 풀가동,간첩선을 격침시키라고 명령했다.더이상 지체했다가는 북한 영해로 도망가버릴것 같았다.간첩선에서도 기습적으로 응사해왔다. 총탄으로 봐서 20mm기관총이었다.갑판에 있던 아군 장교와 사병 한명이 적 총탄에 맞았다.
그러는 사이 간첩선은 북한 영해근처까지 도주하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91함은 전속력으로 달려 간첩선 앞쪽을 가로막았다.그러자 간첩선은 선수를 반대쪽으로 휙하고 돌렸다.91함과는 불과 40m 거리였다.
이때였다.5인치 함포가 간첩선의 후미부분을 겨냥했다.드디어 조준선에 들어왔다.’꽈꽝’하고 함포에서 불을 뿜었다.순간 간첩선에서 검붉은 화염이 솟아올랐다.명중이었다.
함포사격도 멈췄다.주위도 잠잠했다.김제독은 보트를 띄웠다. 무장병력 몇명을 데리고 간첩선쪽으로 접근했다. 선미는 이미 침몰중이고 선수부분만 물위로 뾰족하게 나와 있었다.잠수정과 항해용구 등이 물위에 떠 있었다. 시신은 보이지 앉았다.
김제독은 간첩선을 예인하기 위해 줄을 매달도록 했다.그런데 선체가 이내침몰하는 바람에 예인에 실패하고 말았다.모든 상황이 끝났다.이같은 사실을상부에 타전했다.
김제독은 잠수정 등 간첩선 증거물을 챙긴 채 진해쪽으로 향했다.부상자가있어 훈련에 참가하는 것을 보류한 채 전속력으로 달렸다.진해로 돌아온 김제독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TV 등 언론매체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한일호 사건 등으로 실추된 해군의 명예를 어느 정도 만회한 셈이었다.”””
1996-09-06 9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