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7회)

[新장군 비망록] 전 해병대 사령관 전도봉 장군(7회)

입력 2001-09-07 00:00
수정 2001-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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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봉 장군은 군생활을 하면서 진급할 때마다 항상 전역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닌데다 요주의(?) 인물로 알려져 사실상 단기복무자로 분류됐기 때문이다.소령과 중령 진급을 했어도 아직 단기복무 형태였기 때문에 계급 정년이 끝나거나 새로운 보직이 없으면 전역해야 하는 처지였다.

정보참모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이런저런 연유로 보안사에서는 전 장군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곤 했다.언제 전역할지 모르는데다 군기밀을 핵심적으로 다루는 정보참모라는 요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참모가 끝날 무렵인 80년 11월 새로운 보직을 맡아야 하는데 전 장군에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전 장군은 ‘정보참모로서 군생활을 마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던 어느 날 박희재 여단장이 전 장군(당시 중령)을 불렀다.

“이봐,전 중령.장기복무를 하는 게 어때?” 예상치도 못한 여단장의 제의에 전 중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면서 내심 기쁘기 그지 없었다.여단장의 호의도 호의였지만 단기복무라는 꼬리표를 벗어던지고 앞으로는 그야말로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이 한 몸 바칠 수 있다는 뿌듯함이 절로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여단장님,정말 고맙습니다.기회를 주신다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래,잘 생각했네.자네는 해병대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야.”

여단장은 전 중령의 뜻을 잘 헤아린 다음,즉각 해군본부측에 지휘서신을올렸다.

이렇게 해서 전 중령은 그해 11월 단기복무에서 장기복무자로 신분이 바뀌었다.전 중령은 군생활이나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셈이었다.

며칠후 박희재 여단장이 전 중령을 다시 불렀다.

“전 중령,5대대를 맡게.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적격이야.전 중령도 알다시피 5대대는 여러 문제점이 있는 곳이네.바로 잡아주게나.”

당시 5대대는 여러가지 안전사고 발생 등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아울러 5대대는 1개대로는 무리라고 할 만큼 넓은 강화도 일대 전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전 중령은 80년 12월 2여단 5대대장을 맡았다.단기복무라는 꼬리표를 벗어던진 후 처음 맡은 보직이었다.전 중령으로서는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중령은 존폐여부 등 위기에 처한 5대대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주일만에 완벽한 부대체제로 새롭게 정비했다.사실 이때 문제가 많은 5대대는 강화도 일대에서 빼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대두됐다.그러나 전 중령의 발빠른부대정비로 인해 그같은 의견을 일시에 잠재웠다.

이 무렵 김포 일대에는 해병대 2사단이 창설됐다.해병대사령부 해체 등 코너에 몰려 있던 해병대로서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2사단 창설 비화를 잠깐 살펴보자.

77년 1월 미국 3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 지상군을 4∼5년 안에 걸쳐 철수시키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그러자 우리 군당국은 155마일 전 전선에 걸쳐 방어계획을 새롭게 점검해야 했다.

당시 합참전략기획국장인 손장래 장군의 주도하에 해병대 2여단을 2사단으로 증편하는 계획을 세웠다.그러나 해병대 증편은 당시 군수뇌부의 분위기상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해병대사령부 해체 원인이 “해병대가 너무 비대해진 것이 아니냐”하는 일부 의견속에서 진행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정채호씨(예비역 해병대중령 ‘해병대의 전통과 비화’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2사단 창설비화를 밝히고 있다.

“계획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창설안건을 합참전략회의에 회부한 뒤 각군총장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그러나 이럴 경우 반대에 부딪힐 확률이 높았다.그래서 합참 능력기획과장 정인철 대령이 작성한 브리핑 차트를 마련,손장래 국장과 함께 각군 총장에게 직접 찾아가 2사단 창설계획을 설득했다.때마침 노재현 국방장관과 김종곤 해군총장이 청와대를 방문하게 됐다.이 자리에서 김 총장은 해병대 2사단 창설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노 장관이 측면에서 지원사격을 하게 됐다.그러나 부족한 인원으로 이렇게 짜 맞추고 저렇게 짜 맞추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데다 10·26과 12·12 사건이 발생,창설계획은늦어졌다.”

결국 2사단 창설은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80년 해군본부 제2참모차장인김정호 중장이 합참의장까지 결재를 받았다.그러나 김정호 중장은 곧 예편하게 됐고 그 뒤를 이은 최기덕 중장이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전두환 대통령의결재를 받아 2사단의 출범을 보게 됐다.

정씨의 계속된 증언.

“이 과정에서 흥미있는 비화 한 토막이 있다.제2참모차장 김정호 중장이합참의장 유병현 대장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을 때였다.그런데 갑자기 유병현 대장은 귀신잡는 해병대를 들먹이며 ‘여단이면 어떻고 사단이면 어떠냐.굳이 2사단으로 바꿀 필요가 있느냐’ 하며 결재를 미루었다.그러던 어느날 국방장관이 주관한 친선골프대회가 열렸다.여기에는 미8군사령관도 초청됐다.친선골프대회가 끝난 후 청운각(서울 성북동 소재)에서 불고기 파티가 열렸다.이때 김정호 중장의 부인 정남련 여사가 유병현 대장에게 정중하게 술잔을 건네며 ‘해병2사단 일 때문에 남편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선처해달라’고 했다.유병현 대장은 정 여사의 내조에 감동했던지 그 자리에서 흔쾌히 약속을 했고 이튿날 결재서류에 사인했다.그러나 김정호 중장은 2사단창설의 출범과 브리핑을 전담했던 오윤진 소장의 2사단장 추천 등 두가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전역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81년 4월16일 해병대 2여단은 2사단으로 증편됐다.이때 박희재 여단장이 소장 진급과 함께 초대 2사단장을 맡게 됐다.

전 중령의 입지도 다소 변경됐다.2여단 5대대장에서 2사단 5연대 51대대장으로 바뀌었다.탄력을 받은 전 중령은 사단내 각종 시범(12개 종목)에서 최우수상(11개 종목)을 모조리 휩쓸었다.단 한건의 안전사고도 발생하지 않을만큼 전 중령은 부대지휘를 가장 모범적으로 했던 것이다.

사실 대대장 이전까지만 해도 전 중령은 여러 가지 오해도 많이 받았다.크고 작은 사고가 늘 그의 주변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대대장을 맡으면서 전 중령은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이때부터 군수뇌부에서는전 중령의 능력을 새삼 평가하게 된다.전 중령은 대대장을 마치면서 중령 계급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보국훈장’을 받게 된다.

전 장군의 회고.

“대대장 시절 나의 능력을 새삼 인정해주신 분이 바로 박희재 장군이었다.해병대에 상당한 애착을 가진 그분은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늘 실력과 능력 위주로 부대운영을 했다.내가 장기복무자로의 신분변화를 하는데 있어서도 그분의 도움이 컸다.솔직히 말해 지금도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분이다.”

전 중령은 대대장 시절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바로 존스더글러스 미국 합참의장과의 만남이었다.

81년 4월초 위컴 미8군사령관이 예고도 없이 부대를 방문했다.일주일 후더글러스 미합참의장이 부대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를 앞두고 사전답사차 왔다는 것이다.

미 합참의장의 한국 방문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게다가 해병대를 방문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밖이었다.당시 더글러스 미 합참의장은 5·18 등 일련의어지러운 혼란상황을 겪으며 탄생한 5공화국하에서 전방의 군부대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 방문했다.

부대를 돌아본 위컴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몇가지를 당부했다.

“전 중령,전방에 있는 교통로가 허리높이밖에 안됩니다.아시다시피 미 합참의장은 미 대통령 이상 매우 중요한 신분이오.그러니 신변안전을 위해 전방의 교통로 높이를 어깨높이까지 만들어주시오.”

이렇게 해서 전 중령은 부대원들과 함께 일주일동안 밤낮으로 공사를 벌여 교통로 높이를 어깨높이까지 맞췄다.

전 장군의 회고.

“미 합참의장은 미군내에서 염라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위컴 사령관이 옆에서 수행을 하는데 별넷 단 장군이 사시나무떨듯이 안절부절 못할 정도였다.당시 더글러스의 전방초소 방문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내게는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더글러스 합참의장이 우리부대를 방문하게 된 배경에는 연합사 출신인 박희재 사단장이 평소 위컴과친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전 중령은 80년 12월부터 82년 1월까지 대대장을 지내는 동안 한번도 서울 나들이를 못했다.그래서 하루는 미 해군 상륙전학교에 유학하기 위한 시험을 보게 됐다.굳이 유학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단지 서울구경 한번 해보기위해서였다.시험 장소가 서울에 있는 미8군이었다.그래서 전 중령은 시험을본 뒤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부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날 저녁 미8군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 중령이오? “그렇소.”

“저는 미8군 시험담당관입니다.시험끝난 뒤 전 중령을 아무리 불렀지만안 계시더군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시험결과가 나왔습니다.축하드립니다.1등으로 합격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서울구경 한번 하기 위해 핑계삼아 시험을 본것인데 1위로 합격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전 중령은 82년 2월2일 두번째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다음호에 계속]

김문기자”
2001-09-0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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