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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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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준하 아들’ 장호권씨, 보궐선거서 새 광복회장 당선

    ‘장준하 아들’ 장호권씨, 보궐선거서 새 광복회장 당선

    장준하 선생 아들 장호권 전 광복회 서울지부장이 새 광복회장으로 선출됐다. 광복회는 31일 김원웅 전 광복회 회장 사퇴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후보자 4명 중 장호권 전 지부장이 제21대 회장에 당선됐다고 밝혔다. 장 신임회장은 이날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득표하지 못했다. 그러나 2차 결선 투표에서 경쟁자를 누르고 선출됐다. 장 회장 임기는 김 전 회장의 잔여 임기인 오는 2023년 5월까지다. 독립유공자 장준하 선생 장남인 장 회장은 지난 1997~2005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동남아협의회 자문위원, 희망시민연대 이사장, 싱가포르 한인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어 2005년에는 월간 사상계 대표를 지냈다. 또한 2015년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사무총장을 맡았다. 2019년에는 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 지부장을 지냈다. 현재는 (사)장준하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 전 회장이 지난 2월 횡령 의혹으로 물러나면서 치러진 이번 선거에는 장 후보 외 차창규 전 광복회 사무총장, 김진 광복회 대의원, 남만우 전 광복회 부회장 등 독립유공자 후손이자 광복회 회원 등 4명이 출마했다.
  • 독립운동가 후손 화나게 한 광복회장, 비자금으로 한복 사입었나

    독립운동가 후손 화나게 한 광복회장, 비자금으로 한복 사입었나

    安 “집권시 광복회 국고 지원 끊겠다”국가보훈처 “광복회장 비리, 상당 부분 사실” 의혹 확인광복회장 “제보자 개인 비리…지시한 적 없다” 부인행정안전부 “3·1절 기념식 진행 우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는 14일 수익금 유용 논란 등에 휩싸인 김원웅 광복회장이 직을 계속해서 유지할 경우 집권시 광복회에 대한 국고지원을 끊겠다고 밝혔다. 안 후보는 이날 자신의 SNS에 “광복회 스스로 자정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면 저는 당선되는 즉시 광복회에 대한 국고 지원을 끊겠다”며 이처럼 밝혔다. 안 후보는 김 회장이 광복회가 운영한 카페의 수익금 일부를 유용했다는 의혹과 각종 발언 논란을 빚었던 점 등을 언급하며 “이런 자가 민족 정기의 상징인 광복회장 자리에 있다니 참담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광복회장을 사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아직껏 사퇴를 거부하고 있으니 파렴치가 따로 없다”며 “광복회는 즉시 총회를 열어 김 회장을 내쫓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김 회장과 그 측근들의 여죄는 없는지 스스로 특별감사단을 구성해 조사하고 강력한 내부 쇄신조치를 단행해야 한다”며 “광복회에 대한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정부 차원의 비리 감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광복회장, 어떤 논란 휘말렸나 국가보훈처는 10일 “광복회(에 대한) 특정감사 결과, 광복회의 국회카페 수익사업(헤리티지815) 수익금이 단체 설립 목적에 맞지 않게 부당하게 사용되고 골재 사업 관련해 광복회관을 민간기업에 임의로 사용하게 하는 등 비위가 확인됨에 따라 수사 의뢰하고 해당 수익사업에 대한 승인 취소 등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었다. 보훈처는 “광복회는 국회 카페 중간 거래처를 활용해 허위 발주 또는 원가 과다 계상 등의 방법으로 6100만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조사됐다”며 “비자금 가운데 1000만원가량은 김 회장 개인 통장으로 입금된 후 여러 단계를 거쳐 현금화된 후 사용됐다”고 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비자금이 김 회장 한복·양복 구매비, 이발비 등으로 사용된 사실도 확인됐다. 보훈처는 이 돈으로 김 회장의 한복과 양복 수 벌을 구매한 것으로 판단했다. 김 회장이 광복절이나 3·1절 행사 때마다 입고 나왔던 한복 여러 벌을 비자금으로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보훈처는 김 회장의 ‘가족 회사’가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4층에 사무실을 몰래 내고 공공기관들을 상대로 영업 활동을 벌였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이 사실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 며느리, 조카, 처조카가 임원인 골재 회사 백산미네랄은 광복회 사무실과 집기를 5개월간 무상으로 제공받았다. 이 회사가 광복회 양식에 김 회장 직인이 찍힌 공문을 국방부·여주시청에 보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보훈처는 “문서 등록 대장에 기재되지 않은 채 가공의 문서 번호가 기재된 공문 6건이 확인됐다”고 했다. 보훈처는 “비자금 조성·운용, 골재 기업 관련 비위에 대한 김 회장의 지시·승인·묵인 여부는 수사를 통해 확인될 것”이라고 했다.● “제보자 개인 비리” 주장 이어가는 金 김 회장은 이러한 수익금 횡령 논란 등에 대해 “제보자의 개인 비리”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김 회장의 부인은 언론과의 통화에서 “쓴 일은 있지만 돌려줬다”는 등의 답을 해 상반된 입장을 보였었다. 또한 보훈처는 김 회장을 상대로 1차 서면, 2차 대면 조사를 벌였다. 김 회장은 “절대 내가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다. (제보자인) A씨가 과잉 충성을 하느라 제멋대로 비자금을 조성했고, 이후 사실을 안 뒤에 금액을 모두 채워넣었다”고 주장했다. 광복회 수익금을 전용, 김 회장 개인 용도로도 사용했지만 본인이 시킨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윤봉길 의사 손녀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은 10일 보훈처 감사로 비위 의혹이 드러난 김 회장을 두고 “사퇴하라”고 일갈했다. 또한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 전 광복회 서울지부장은 11일 “광복회 책임자가 수익사업에 손을 대고 횡령 혐의로 수사까지 받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며 “김 회장은 더 큰 죄를 짓기 전에 자진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날 입장문에서 “제보자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보훈처가) 발표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그는 “비자금 조성을 지시한 적도 없고 돈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전혀 모른다”며 “나를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퇴 의사는 전혀 없다”고도 했다. 김 회장은 2019년 6월 취임해 임기는 내년 5월까지다. 그러나 논란에 따라 일부 광복회원은 오는 22일 임시총회를 소집해 김 회장 불신임 투표를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구성원 절반 발의로 임시총회를 소집하고 재적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회장을 해임 가능하다. 다만 김 회장 등 집행부가 총회 소집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김 회장 해임은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편 행정안전부는 김 회장 사퇴가 늦어질 경우 오는 3·1절 기념식 진행이 매끄럽지 않을 가능성도 우려하는 것으로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본래 3·1절 기념식엔 광복회장이 참석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곤 했었다. 정부 관계자는 12일 언론에 “김 회장이 비자금으로 구매했다는 논란이 있는 한복을 입고 공식 석상에 서는 모습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고 했다.
  • 대선 한달여 앞두고 정치 영화 봇물...흥행 성공할까

    대선 한달여 앞두고 정치 영화 봇물...흥행 성공할까

    대선을 한달 남짓 앞두고 영화계에도 격동의 근현대사를 다룬 정치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한다.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정치인의 실화 영화부터 다큐멘터리, 최근 정치 상황을 다룬 작품들이 2월 내내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26일과 27일에는 김대중 던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두편의 영화가 연이어 개봉했다. 26일 개봉한 영화 ‘킹메이커’는 196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 국회의원 당선부터 처음 대통령 후보가 된 1970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까지 김 전 대통령의 선거 도전사가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졌다. 그와 함께 했던 선거 참모 엄창록의 실화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했던 김 전 대통령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27일 개봉한 김진홍 감독의 다큐멘터리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도 김 전 대통령에 관한 작품이다. ‘킹메이커’에서 주로 다뤘던 1970년 대선 후보 경선 이후를 다룬다. 독재에 맞선 정치 신인에서 전두환 신군부의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사형수가 되고,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3전 4기 끝에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 1990년대까지를 아우른다.유신 독재에 맞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치열하게 살다 간 문익환 목사의 삶을 다룬 ‘늦봄2020’은 다음 달 10일 개봉한다. 문 목사는 1918년 만주 용정시에서 태어나 윤동주, 송몽규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평양 숭실학교에서 장준하를 만나 친구가 됐다. 일제의 탄압으로 젊은 시절 윤동주와 송몽규를 잃은 그는 신학을 강의하고 성서를 번역하는 목사이자 학자로 살다가, 유신정권의 폭압 아래 장준하마저 잃고 50대 후반의 나이에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면서 ‘늦봄’이라는 호를 지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선정한 ‘2020년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린 전주MBC의 동명 다큐멘터리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특히 이 작품에는 인공지능(AI) 기술로 복원된 문 목사의 목소리가 그 시대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같은 날 개봉하는 ‘나의 촛불’은 배우 김의성과 기자 주진우가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에 맞서 수많은 시민이 광장으로 모였던 2016년의 촛불 시위를 돌아본다. 이 영화는 2018년 기획 돼 2019년 만들어졌지만 코로나 상황 등으로 인해 대선을 앞두고 개봉 하게 됐다. 특히 3월 대선을 앞두고 대선 후보들의 인터뷰 등이 담겨 눈길을 끈다. 제작진은 “대선 후보 중에 안철수 후보만 사진이고 나머지 분들이 모두 영화에 나온다. 어쩌다보니 대선 후보가 다 출연했는데 약이될지 독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MBC 기자 출신 이상호 감독이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전투왕’도 다음 달 18일 공개된다. 당초 지난해 12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전두환의 사망으로 공개가 미뤄졌다.
  • 벌써 4번째 재조사… 이번엔 ‘장준하 의문사’ 진실 밝혀낼까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독립운동가 고 장준하 선생(1915∼1975) 의문사 사건에 대한 조사를 4번째로 시도한다. 진실화해위는 22일 제13차 위원회를 열고 장준하 의문사 사건 등 625건의 사건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을 의결했다. 장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광복군 활동을 통해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다. 광복 뒤에는 언론인과 민주화 운동가로 유신독재 반대운동을 하다가 1975년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이 깨끗하고 목격자의 진술이 현장과 전혀 들어맞지 않아 사망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2013년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장 선생의 두개골 함몰이 외부 가격에 의한 손상으로 가격을 당해 즉사하고 나서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유골 감식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장준하 의문사 사건은 1·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진상규명 불능’, 1기 진실화해위에서는 중요 참고인의 출석 거부와 국가정보원의 자료 제출 거부로 ‘조사중지’ 결정이 내려져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박지원 국정원장이 1960∼1980년대 정보기관의 수사 과정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사과 서한을 보내며 진실화해위에 자료를 충실히 제공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이번엔 진실규명이 가능할 거라는 기대가 높다.
  • “이대로 동생 죽음 묻히면… 저 하늘에서 무슨 말 해”

    “이대로 동생 죽음 묻히면… 저 하늘에서 무슨 말 해”

    1989년 이내창 열사 의문사 진정서 낸여든 된 형 이래석씨 “정부 나서야” 호소 장준하 선생 사망 등 18건 위원회에 제출유족들 “고인의 명예회복할 마지막 기회”위원 임명 매듭 땐 10년 만에 조사 재개“내 나이가 여든이야. 이대로 동생 죽음이 묻히면 곧 하늘에서 만날 동생한테 무슨 말을 건넬 수 있겠어.” 10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만난 이래석(80)씨는 동생 이내창 열사 의문사 사건의 조사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접수한 소감을 묻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민족미술운동을 주도하며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을 지내던 이 열사는 1989년 거문도 해수욕장에서 갑작스레 숨진 채 발견됐다.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이 드러났지만, 국정원의 자료 제출 거부로 최종 규명이 불가능하다고 결정됐다. 2006~2010년 활동한 1기 진실화해위에서도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씨는 “이번에는 부디 꼭 정부가 나서서 어떻게든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고 호소했다. 군사정권 시절 권력기관에 의한 의문사 사건 유족과 추모단체로 구성된 ‘의문사진상규명30+’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의문사 18건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 조사가 곧 개시될 예정이지만 유족들은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지난 1·2기 의문사위와 1기 진실화해위 조사 당시 정보기관의 비협조로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될까 불안해서다. 유족들은 이번이 고인들의 명예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들이 정부가 전보다 강력한 의지로 진실 규명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이유다.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72) 장준하기념사업회장은 “지난 30년 동안 유가족의 가슴은 피눈물과 멍이 맺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며 “이번에는 조사를 확실하게 끝내 의문사를 조사하는 국가기관이 다시 탄생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만은 국정원에서 자료를 주지 않아서, 국군기무사령부(현 안보지원사령부)에서 협조를 하지 않아서 진실규명 불능이라고 결정하지 말아 달라”며 “싸워서라도 협조를 받아 내 모든 분의 한 맺힌 응어리를 풀어 달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는 위원들에 대한 대통령 임명 절차가 마무리되면 10년 만에 조사를 재개한다. 군사정권 시절 최악의 인권유린 사례로 꼽히는 형제복지원 사건 등 굵직한 사건 조사를 앞두고 있다. 지난 9일 기준 현재까지 신청 건수는 2465건, 신청인은 4445명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65년 출판 외길 동서문화사 고정일 대표 별세

    65년 출판 외길 동서문화사 고정일 대표 별세

    1956년 창립 이후 학술·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발행해온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가 지난달 27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81세. 동서문화사는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고 2일 밝혔다. 1940년생인 고인은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비교문화학을 전공했다. 1952년 서점 겸 출판사인 영창서관에 소년 사원으로 입사한 뒤 동서문화사를 창업해 65년 동안 출판사를 운영했다. 1956년 12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 세네카의 ‘지혜와 사랑’을 처음 출간했다. ‘대망’,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한국세계사상전집’, ‘동서문고’, ‘그레이트북스’, ‘한국세계대백과사전’ 등 5000여종을 발간해왔다. ‘사상계’의 장준하 사장 유지를 이어 1977년에는 동인문학상을 부활, 운영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를 통해 1979년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부터 전상국, 오정희, 이문열, 김원일, 정소성 등 한국현대문학 대표작가들이 배출됐다. 한국서적협회 운영위원장,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감사 등을 지냈다. 문교부우수도서상·한국출판문화상·한국독서대상 등도 받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백기완 선생이 병상에서 문재인 정부에 남긴 말

    백기완 선생이 병상에서 문재인 정부에 남긴 말

    “민중의 자존심을 갖고 소신대로 해보시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현대사를 90년 가까운 삶에 아로새긴 그의 시선은 늘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을 향했다. 병상에서 백기완 선생은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진 않겠지만 그저 병실에서 한마디 남깁니다”라며 문재인 정부를 향해 당부의 말을 남겼다. 백기완 선생은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다가서는 그 태도, 방법. 다 환영하고 싶습니다. 생각대로 잘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 보태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세월호 리본을 단 백기완 선생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에 주체적인 줄기였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운동의 그 맥락위에 서있다는 깨우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백기완 선생은 “지난 촛불혁명은 우리 한반도의 참된 평화요, 민주요, 자주통일.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통일이었습니다. 그 맥락위에 서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재인 정부 민중적인 자부심과 민중적인 배짱을 갖고 소신대로 한번 해보시오!”라고 힘을 실어주었다.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될지라도 백기완 선생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투사, 사회운동가인 동시에 새내기, 동아리, 달동네 등 수많은 한글어를 만들어낸 우리말 운동가, 소설 <버선발 이야기>,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을 펴낸 문필가였다. 그는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백태주는 천석꾼의 부자로 장련면의 유지로 있으면서 3.1 운동 당시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청년운동에도 나섰다. 두 부자는 각각 1923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수해와 지진피해가 있었을 때와 1934년 삼남지방 수재 당시에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휼에 힘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지만 조부 백태주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어주다가 발각돼 고문 끝에 옥사당한 이후 가계가 급격히 몰락했다.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북이 분단되며 가족도 나뉘어 살게 됐다. 백 선생은 이때 부산제5육군병원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전쟁 통에 징용된 작은 형이 죽기도 했다. 이같은 가족사는 이후 백 선생이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용산구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몽둥이로 두드려 맞고 무릎을 앞으로 꺾이고 손톱을 뽑히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건장하던 몸은 반쪽이 됐다. 두 번째 옥고도 치렀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마지막 원고엔 “김진숙 힘내라”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가장 최근 행보는 지난해 12월 ‘연내 중대재해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는 사회원로 기자회견’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당일 백 소장은 몸이 불편한 탓에 하루 온종일을 들여 쓴 육필 원고를 보내왔다. 그의 원고에는 “김진숙 힘내라”는 여섯 글자가 담겨있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한일협정 반대로 민주화 운동 전면 나서YMCA 위장결혼 사건 등 수차례 옥고백원담 “父 마지막 글귀는 ‘노나메기’”“김미숙·김진숙 힘내라” 병상 메시지도 “그 돈 이웃 도와야” 유지… 靑조화 거부전국 16곳 분향소… 19일 대학로 노제“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폐렴 투병 끝에 별세했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그는 민중의 장쾌한 수호자 ‘장산곶매’가 돼 하늘로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교수)·미담(화가)·현담(출판사), 아들 일(울산과학대 교수)씨가 있다. 90년 가까운 그의 삶엔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질곡의 현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못 배우고 못 가진, 그리하여 배우고 가진 자들에게 압제받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앞서서 나가는’ 삶을 선택했다.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인 데다 분단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지만 독학으로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키워 나갔다. 6·25전쟁 중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기 위해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직전에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노동자 민중후보로 추대됐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송경동 시인은 “백 선생이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는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전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평소 지론답게 여러 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냈다. 우리말 사랑도 남달랐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젊은 날’, ‘버선발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한일협정 반대로 민주화 운동 전면 나서YMCA 위장결혼 사건 등 수차례 옥고백원담 “父 마지막 글귀는 ‘노나메기’”“김미숙·김진숙 힘내라” 병상 메시지도 “그 돈 이웃 도와야” 유지… 靑조화 거부전국 16곳 분향소… 19일 대학로 노제“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폐렴 투병 끝에 별세했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그는 민중의 장쾌한 수호자 ‘장산곶매’가 돼 하늘로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교수)·미담(화가)·현담(출판사), 아들 일(울산과학대 교수)씨가 있다. 90년 가까운 그의 삶엔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질곡의 현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못 배우고 못 가진, 그리하여 배우고 가진 자들에게 압제받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앞서서 나가는’ 삶을 선택했다.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인 데다 분단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지만 독학으로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키워 나갔다. 6·25전쟁 중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기 위해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직전에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노동자 민중후보로 추대됐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송경동 시인은 “백 선생이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는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전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평소 지론답게 여러 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냈다. 우리말 사랑도 남달랐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젊은 날’, ‘버선발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김구·이동녕 등 요인 뒷바라지 26년… 살림 도맡은 ‘임정의 어머니’

    김구·이동녕 등 요인 뒷바라지 26년… 살림 도맡은 ‘임정의 어머니’

    “임정의 살림은 석오장(이동녕)과 백범(김구) 몇 분이 거의 다 짊어지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돈이 바닥날 때가 많았고 그럴 때면 그야말로 끼니가 간데없어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면서 한 술씩 얻어 드시기까지 했다.”(‘장강일기’·정정화) 정정화 선생은 192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살림을 책임지고 요인들을 뒷바라지한 ‘임시정부의 안주인’이었다.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임정 요인들 가운데 선생이 지어 준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김구는 여기저기 다니다가 “나 밥 좀 해줄라우” 하면서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임정의 살림은 늘 궁핍해서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고 그럴 때마다 선생은 자신의 잘못인 듯 애간장을 태웠다.선생은 1900년 8월 3일 수원 유수를 지낸 정주영의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향 충남 예산에 많은 땅을 가진 부자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신식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어깨너머로 천자문과 소학을 떼었고 성인이 돼 영어와 신학문을 공부해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선생의 인생은 겨우 열 살에 동농 김가진의 3남 김의한과 결혼하면서 완전히 바뀐다. 김가진은 황해도 관찰사, 농상공부 대신 등을 지낸 구한말의 문신이었다. 그러면서 대한협회 회장을 맡아 국권 회복에 앞장서고 경술국치 후에도 대동단을 결성해 총재로 활동한 우국지사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10월 김가진은 아들 김의한과 중국 상하이로 망명,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중국행을 뒤늦게 안 스무 살의 ‘겁 없는 여인’은 이듬해 1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일제의 눈을 피해 단신으로 상하이로 갔다. 가자마자 접한 것은 독립운동이라는 대의명분보다 먹을 것마저 부족한 가난이었다. 상하이 임정 가족들의 생활은 주먹덩이밥과 한두 가지 반찬으로 때울 정도로 어려웠다. 누구나 값싼 천으로 만든 중국 의복 창산(長衫)을 걸치고 헝겊신을 신고 다녔다. “이름, 명예, 자존, 긍지보다는 우선 급한 것이 생활이었다. 포도청 같은 목구멍이었다. 머리를 내밀고 팔다리라도 내놓을 만한 누더기 한자락이 절실했던 것이다.”(‘장강일기’)●외동아들 김자동, 현재 기념사업회장 맡아 홀몸으로 중국에 건너왔듯이 선생은 중국에 온 지 겨우 달포쯤 지난 후 홀로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러 국내로 잠입하겠다고 ‘당돌한’ 결정을 내린다. 갓 스물의 당찬 아낙네는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3·1운동 직후 일제의 서슬이 퍼렇던 국내로 숨어들어 왔다. 임정의 지시를 따라 이곳저곳을 다닌 끝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돈을 구해 중국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도 돈을 구해 무사히 귀환했지만 세 번째에는 일제에 붙잡히고 말았다. 동행인이 장담하는 바람에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다 체포돼 신의주 경찰서로 끌려가 이틀 동안 고초를 당한 후 풀려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22년 7월 4일 일흔이 넘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시아버지 김가진이 세상을 떴다. 네 번째로 국내에 들어왔을 때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친정아버지가 별세했고 선생은 상을 치른 후 1923년 7월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선생은 1928년 외동아들 김자동을 낳았다.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으로 불리는 김자동(92)은 광복 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하기도 했다. 현재는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다. 망명 10년째이던 1929년 7월 선생은 여섯 번째로 다시 고국 땅을 밟은 뒤 1년 6개월간 체류했다. 하지만 국내의 분위기는 지인들도 선생을 냉대할 만큼 변해 가고 있었다. 1931년 초 선생은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면서 독립이 되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정은 일제의 체포를 피해 상하이를 탈출, 자싱(嘉興)으로 옮겨 갔다. 선생은 그곳에서도 임정 요인들과 식구들을 챙겼다. 김구는 남호라는 호수의 배 안에서 은신했다. 김구에 대한 추적이 강화되자 임정은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가흥으로 모셔 왔다. 선생은 곽 여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김구의 식구들을 보살폈다. 한번은 곽 여사의 생신 때 비단 옷을 사다 주었는데 곽 여사는 “지금 우리가 이나마 밥술이라도 넘기고 앉았는 건 온전히 윤 의사의 피값이야. 피 팔아서 옷 해 입게 생겼나”라고 야단을 치며 물려오라고 했다.●20여년 모셨던 이동녕 선생 임종 끝까지 지켜 그 무렵인 1935년 11월 선생은 임시정부 여당으로 창립한 한국국민당에 가입했다. 독립운동 단체에 적(籍)을 두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정과 지도부는 후난(湖南)성 창사(長沙)로 옮겨 갔다. 선생은 이시영을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이듬해 5월 우익 3당 통합 회의 도중 이운환이 3당 대표들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구는 중상을 입었고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하고 말았다. 이들을 간호하고 보살핀 것은 선생이었다. 일본의 공격이 거세지자 임정은 또다시 창사를 떠나 광주를 거쳐 포산(佛山)으로 옮겨 갔다. 1938년 가을부터 선생은 임정의 안살림을 본격적으로 맡게 됐다. 딸린 가족이 없는 이동녕 등 국무위원들을 수발하며 살았는데 선생은 혼자 망명 생활을 하던 너덧 사람을 광복이 될 때까지 모셨다. 포산 생활도 잠시였고 임정 식구 100여명은 일본군의 공습을 받으며 기차로, 배로 목숨을 건 피난을 계속했다. 힘든 여정 속의 뒷바라지는 선생의 몫이었다. “밥은 배 위에서 삼시 세끼를 다 해먹을 수밖에 없었다. (…) 국무위원 전원을 돌봐 드려야 했으므로 (…)육지로 올라가서 시장을 봐 오는 것도 일 중의 하나였다.”(‘장강일기’) 임정 식구들은 한 달 열흘을 배 위에서 지내기도 하는 등 장쑤성에서 출발한 후 장장 5000㎞의 대장정 끝에 치장(江)에 도착했다. 치장에서도 선생은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안주인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1940년 3월 선생이 아버지처럼 여기며 20여년 동안 모셨던 이동녕이 별세했다. 마지막 열흘 동안 곁을 지킨 사람도 선생이었다.치장 근처 충칭(重慶)으로 옮긴 임시정부는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광복군을 창설해 당·정·군 체제를 갖추었다. 정정화도 한국독립당 창립 당원이 됐고 같은 해 6월 한국독립당 여성 조직인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간사로 선출됐다. 1941년 1월 임정 가족들은 충칭 근처의 투차오(土橋)로 이사해 5년 동안 모여 살았다. 여기서도 선생의 역할은 컸다. 특히 남편이 일제에 체포된 부인과 가족들의 바느질도 해 주며 보살폈다. 외국 손님 접대 등 임정의 큰일도 총책임을 맡았다. 장준하 등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 출신 청년 50여명을 위해 선생은 투차오의 교회 강당을 개조해 임시 막사로 제공하고 동생처럼 돌봤다. 1943년 2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에서 선생은 훈련부 주임으로 선임됐다.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갔다. 그러던 중 선생은 투차오에서 광복을 맞았다. 선생은 임정 요인들이 충칭을 떠나고 나서도 투차오에 남아 뒤처리를 마치고 이듬해 5월 9일에야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임정 요인들은 선생의 정성 어린 뒷바라지에 힘든 투쟁 속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나아가 26년이라는 기나긴 임시정부의 타국살이도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장동석 평론가의 뉴스 품은 책] 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문화연표

    [장동석 평론가의 뉴스 품은 책] 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문화연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 민주주의 지킴이’라 불리는 한 잡지와 싸움 중이다. 바로 160년 전통 ‘애틀랜틱’이다. 애틀랜틱은 트럼프가 참전 군인들을 비하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고, 트럼프는 “나보다 더 그들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로 사태를 막으려 한다.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 보면, 잡지 한 권이 세상을 움직인 경우도 많았다. 장준하 선생 주도로 1953년 창간한 ‘사상계’는 민족, 민주주의, 남북문제에 관한 논쟁적인 글로 1950~1960년대 식자들의 필독 잡지로 자리매김했다. 1976년 창간한 문화잡지 ‘뿌리깊은 나무’는 우리말에 대한 애착과 가로쓰기 등으로 이후 잡지들의 준거가 됐다.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은 해방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출간한 126종 잡지, 123편 창간사로 당대 문화를 읽어낸다. 현대 문화사와 문학사를 연구하는 저자 천정환은 “잡지사(史)가 문화의 연표”라고 강조한다. 당대의 문화적, 사회적 자장 안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흐름을 짚어 내고, 새로운 조류를 제시하는 게 잡지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창간사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창간사에는 어떻게 세상을 ‘취재’, ‘편집’해서 보여 줄 것인지에 대한 창간 주체들의 방향이 천명된다. 고로 대개 창간사는 ‘선언’이다”라고 설명한다. ‘뿌리깊은 나무’ 창간사에서 한창기 발행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잘 사는’ 일은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뿐만이 아니라 억울함과 무서움에서도 벗어나는 일입니다. 안정을 지키면서 변화를 맞을 슬기를 주는 저력. - 그것은 문화입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 냈고, 문화가 가진 창의성이 대안임을 보여 줬다. 문화의 힘은 1960년대 4·19혁명의 뿌리였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책은 잡지 출간을 막으려 종이 공급을 통제한 일제와 독재정권의 정책을 고발하며 시대의 아픔까지 훑어 낸다. 1990년대에 무크 등 다양한 형태의 잡지가 나오면서 시대의 문화를 견인한 사례도 열거한다. 그야말로 시대의 증언이자, 잡지 혹은 출판문화 발전의 사례집인 셈이다. 한동안 잡지의 종말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럼에도 잡지는 또 새로운 모습으로 창간한다. 원래 속성상 ‘잡’(雜)스러워 생명력이 길기 때문일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했으니, 우리 문화를 견인하는 새로운 잡지의 탄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옛 잡지의 말들을 읽어 보는 일도 나름 괜찮을 듯하다.
  • CBS 기자 확진 중앙 언론사 최초 ‘셧다운’, 정규 방송 중단

    CBS 기자 확진 중앙 언론사 최초 ‘셧다운’, 정규 방송 중단

    CBS 표준 FM(98.1㎒)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한 기자가 지난 18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여러 사람과 접촉한 것으로 확인돼 CBS가 19일 정규 방송을 중단했다. 중앙 언론사가 코로나19 때문에 ‘셧다운(사업장 폐쇄)’ 된 것은 CBS가 처음이다. CBS에 따르면 해당 기자는 지난 17일 오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다음날 오후 늦게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지난 17일 방송된 프로그램에는 앵커인 김현정 PD는 물론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와 다수 기자, PD, 스태프가 참여해 연쇄적 감염 우려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 CBS는 즉각 셧다운 조치를 했다. 특히 18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CBS 사옥에서는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를 통해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 토론회까지 열린 상황이라 집단 감염 우려가 더 크다. CBS는 일단 라디오를 종일 음악 방송으로 대체하고 있다. 방송사 관계자는 “`김현정의 뉴스쇼’ 뿐만 아니라 모든 프로그램을 중지한다”며 “TV 방송의 경우 사전 녹화 프로그램이 많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 직원들도 모두 출근하지 않고 재택근무를 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낙연 후보는 일단 19일 오전에 국립의료원으로부터 음성 판정을 받고 활동 재개 여부를 캠프 안에서 논의하고 있다. 같은 당 김용민 의원, 미래통합당 최형두 원내대변인도 해당 확진자와 간접 접촉한 것으로 전해져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특히 이 후보는 이날 오전 김대중 전 대통령 11주기 추도식에서 정세균 국무총리와 박병석 국회의장을 비롯해 여야 지도부와 두루 접촉해 코로나 쓰나미가 정치권에 덮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확진자 간접 접촉 시점부터 자가 격리에 들어간 이틀 사이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다. 이 후보는 18일 오전 국립 현충원에서 거행된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 박병석 국회의장과 정세균 국무총리,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추미애 법무부 장관,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최재성 정무수석,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등이 모두 참석했다. 오후에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민주당 지도부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김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사진전 개막식을 찾았다. 이어 김부겸 박주민 후보와 CBS 방송 토론회에 참석, 1시간 30분가량 밀폐된 스튜디오 안에서 함께 있었다. 이 후보는 전날 확진자 간접 접촉 직후에는 경기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故) 장준하 선생 45주기 추모식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긴급조치 1호 위반’ 장준하 유족에게 7억 8000만원 국가배상 판결

    ‘긴급조치 1호 위반’ 장준하 유족에게 7억 8000만원 국가배상 판결

    박정희 정권 당시 긴급조치 1호 최초 위반자로 옥고를 치른 장준하(1918~1975) 선생의 유족에게 국가가 7억 8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긴급조치에 국가배상은 불가하다’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판례에서 벗어난 결과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 김형석)는 장 선생의 유족 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가 총 7억 8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인사인 장 선생은 1973년부터 유신헌법 개정을 주도하다 이듬해 긴급조치 1호의 최초 위반자로 영장 없이 체포·구금되고,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나 1975년 경기 포천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재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38년 만인 2013년 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장 선생에게 적용됐던 긴급조치 1호는 2010년 대법원에서 위헌·무효라고 판단했고, 헌법재판소도 2013년 위헌 결정을 했다. 다만 양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5년 대법원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라며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이후 상당수 판결은 대법원 판례를 따랐다. 그러나 이번 재판부는 “당시 대통령은 국민 기본권이 침해될 수 있음을 알았음에도 국민 저항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를 발령했다”며 “이로 인해 실제 피해를 본 장 선생에게 고의 또는 중대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를 했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신종 코로나와 음모론/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신종 코로나와 음모론/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음모론’은 사회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로 주장하는 일종의 설명 행위다. 명확한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지만 두 개 이상의 사건에 연결점이 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여러 가설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그것을 ‘있을 법한 이야기’로 말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이게 바로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행위 때문이다. 사실 음모론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 숱하게 존재해 왔다. 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비롯해 인터넷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더 빈발하고 더 강력하게 몸집을 키웠다. 음모론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들은 “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어도 정보가 너무 부족한 데다 그 당연한 불확실성 때문에 의지하게 되는 ‘의미 형성’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음모론은 우리의 현대 역사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1975년 독립운동가 장준하 의문사 사건, 1987년 11월 KAL기 피격 사건, 2014년 세월호 잠수함 격침론을 비롯해 큰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사회는 매번 음모론에 휘말렸다. 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인 아돌프 히틀러 생존설을 비롯해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과 9·11 테러의 조작설, IS의 미국 배후설까지,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모론이 세상을 뜨겁게 달궜다. 그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이고 그럴싸한 게 질병과 관련된 음모론이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개막을 6개월 남짓 남겨 놓은 2016년 2월 무렵부터 브라질을 비롯해 남미 대륙은 지카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집트숲 모기를 매개로 하는 이 질병은 특히 신생아 소두증의 원인으로 알려지면서 대낮 총격전이 빈발하던 리우데자네이루의 치안보다 더 심각한 ‘올림픽 흥행’의 악재로 떠올랐다. 음모론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뎅기열 모기 퇴치를 위해 영국의 한 바이오기술 회사가 유전자를 변형시킨 모기를 만들어 대량 방사했는데, 이게 지카바이러스 창궐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 회사가 빌 게이츠가 설립한 재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내용도 보태졌다. 꼭 4년이 흐른 지금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중국은 물론 전 세계가 휘청거리고 있다. 마침 도쿄올림픽을 앞둔 시점이라 리우대회 때의 ‘데자뷔’(기시감)를 마주하는 것같이 오싹하기까지 하다. 여지없이 이 질병에 관한 ‘음모론’도 바이러스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우한의 바이러스 연구소가 생화학무기 개발 중에 퍼뜨렸다는 ‘대륙 실수론’부터 수개월째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는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잠재울 중국의 정치적 전략설이 나름의 설득력을 타고 SNS를 숙주 삼아 확산됐다. 심지어 세계 인구를 자신들이 다스릴 만큼인 5억명 수준으로 조절하기 위한 대량 살상의 방책이라는, 종교 미스터리 영화의 단골손님인 ‘일루미나티’의 음모설까지 제기된 마당이다. 서강대 사회학과의 전상진 교수는 저서 ‘음모론의 시대’에서 “복잡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지친 사람들은 단순하고 확실한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한 번 믿게 된 바를 쉽게 버리려 하지 않는다”고 음모론의 속성을 분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정보를 흡수하고 그 선택을 통해 고통을 설명할 신념을 구상하지만 그 신념의 맨 얼굴은 때론 무의미할 만큼 초라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음모론은 한때 바이러스처럼 창궐하지만 결국엔 결론도 정답도 없이 겉껍데기밖에 남지 않는다는 얘기다. cbk91065@seoul.co.kr
  • ‘장준하 평화관’ 건립 밑그림 나와

    ‘장준하 평화관’ 건립 밑그림 나와

    경기 포천시가 건립을 추진중인 ‘장준하 평화관’의 윤곽이 구체화 되고 있다. 포천시는 최근 열린 타당성조사 용역 최종보고회에서 ‘장준하 평화관’을 도서관(Library)·기록관(Archive)·박물관(Museum)의 기능을 제공하는 라키비움(Larchiveum) 형태로 건립하는 것이 적절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작가 예술인들을 위한 레지던시 시설도 마련해 국내 최초 레지던시형 라키비움 조성에 대한 의견이 제안되었다. 박윤국 시장은 “이날 회의는 ‘장준하 평화관 건립’을 통해 선생의 유지를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킬지 생각을 모으고, 타당성 용역 최종보고회를 통해 평화관 건립의 밑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포천시는 제시된 의견이 반영된 타당성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내년 초 중앙부처와 지원 협의 등 행정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장준하 선생은 1918년 8월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고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1975년 8월 17일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날 회의에는 지난 9월 구성된 ‘장준하 평화관 건립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인 박윤국 시장과 장준하 기념사업회 장호권 회장, 이원웅 경기도의원, 이한용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상임대표, 이상인 자치분권연구소 소장, 남궁종 포천시 산림조합장, 서정미 안양대 교수, 허훈 대진대 교수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독립운동가 장준하 아들이 조국 딸에 보낸 편지

    독립운동가 장준하 아들이 조국 딸에 보낸 편지

    독립운동가인 고(故) 장준하 선생의 아들이 입시 특혜 의혹을 받고 있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딸 조모씨에게 공개 편지를 남겼다. 미국 코네티컷에 거주하며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장호준씨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조양의 아버지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며 조양이 당하고 있을 일에 더욱 화가 나고 많이 아팠다”며 글을 시작했다. 장씨는 자신이 어린시절 겪은 일화를 꺼냈다. 그는 “어릴 때 야구하다 남의 집 물건을 깨트리면 집주인이 내 등을 두드려주며 ‘너희 아버님이 어떤 분이신데, 네가 이렇게 놀면 되겠니?’라고 했다. 다른 애들처럼 그냥 몇 대 쥐어박고 보내주면 될 것을 꼭 아버지 이름을 꺼냈다. 그게 싫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아버지 이름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시치미였다. 학교와 군대에서 요시찰 대상이 돼 부당한 압박을 받았던 것도 내가 아버지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면서도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내게 큰 혜택을 주기도 했다. 신학교 시절 장학금 받은 것도, 해외 후원금을 받으며 암울한 시절을 버틴 것도 내가 아버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장씨는 조 후보자 딸에게 “물론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는 ‘하필 내가 왜 조국의 딸이어서’라는 소리가 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 내 아버지가 조국이다’라는 소리가 더 크게 외쳐지리라 믿는다”고 응원했다. 또 “지금 조양의 아버지에게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있는 자들로 인해 조양이 겪고 있을 아픔의 시간들을 자랑스럽게 새겼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내 나이 환갑이 지났지만 아직도 ‘장준하 선생의 삼남’이라고 소개되는 게 자랑스럽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장씨는 “지금은 조양이 아버지를 안아 드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만일 내가 조양의 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딸아이가 나를 한 번 안아주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라며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 ‘그래 내가 조국의 딸이다’를 더욱 크게 외치는 조양이 되리라 믿는다”며 글을 마무리했다.고 장준하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월간 ‘사상계’를 발행한 언론인이자 국회의원, 재야운동가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중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 등산길에서 의문사했으며 사후인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또 나선 유시민 “조국 위선자? 다 헛소리”… 박원순 “꼭 필요한 인물”

    노무현재단 유시민 이사장, 박원순 서울시장, 독립운동가인 고(故) 장준하 선생의 3남인 장호준씨 등이 공개적으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옹호하고 나섰다. 최근 소위 진보 측 인사들이 펼치는 ‘조국 구하기’의 일환으로 보인다. 박 시장은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조 후보자를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서 “곁에서 지켜본 조국은 대한민국을 좀더 나은 사회로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데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썼다. 또 그는 “며칠 전 조국 후보자와 짧은 통화를 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하기에 인간적으로 작은 격려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었다”고도 했다. 장씨도 이날 조 후보자의 딸 조모씨를 응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는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는 ‘하필 내가 왜 조국의 딸이어서’라는 소리가 들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 내 아버지가 조국이다’라는 소리가 더 크게 외쳐지리라 믿는다”며 “‘그래 내가 조국의 딸이다’를 더욱 크게 외치는 조양이 되길 믿는다”고 했다. 유 이사장은 지난달 29일 한 라디오방송에서 조 후보자를 옹호한 데 이어 이틀 후인 31일 “조국 후보자를 위선자, 이중인격자, 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다 헛소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봉하음악회에 참석한 그는 조정래 작가와의 대담에서 “지금은 언론과 야당이 제기하는 의혹과 조 후보자 측의 팩트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론을 내기에 충분치 않다”고 했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지정생존자’ 지진희, 연기력+노력+진심으로 완성한 ‘인생작’

    ‘지정생존자’ 지진희, 연기력+노력+진심으로 완성한 ‘인생작’

    ‘60일, 지정생존자’ 지진희의 물오른 연기력이 주목받는 가운데, 노력으로 완성한 ‘지진희 시그니처’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다. 지난해 JTBC ‘미스티’로 어른 멜로의 열풍을 이끈 지진희는 이번 tvN ‘60일, 지정생존자’의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 전작을 잊게 하는 새로운 얼굴을 선보였다. 처음부터 지진희를 위한 역할이었던 것처럼 지진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에 완벽히 부합되는 이미지는 물론, 한층 깊어진 연기력을 보여주며 호평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 가운데, 연기력과 비례하는 지진희의 열정이 눈길을 끌고 있다. 지진희가 맡은 ‘박무진’은 교수, 환경부장관에서 하루아침에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맡게 된 인물로 드라마틱한 서사를 갖고 있다. 지진희는 이러한 캐릭터의 입체성을 매끄럽게 표현하기 위해 소품, 스타일, 말투, 자세 등 시청각적인 부분에서도 세심하게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진다. ◆시그니처 1. 안경 + 구두 + 헤어스타일 먼저 안경과 구두는 박무진(지진희)의 심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드라마 초반 구두를 불편해하는 지진희의 발 장면이 자주 포착됐는데, 이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박무진의 성격과 불안한 입지를 드러낸다. 이후 지진희는 굳은살이 배기고 익숙해진 듯 더는 발을 들썩거리지 않았다. 발이 구두 속에 굳건히 자리 잡은 것처럼 박무진이 정치 세계에 적응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불어 지진희는 지도자의 고뇌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안경을 이용했다.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들을 반복하는 박무진. 참을 수 없는 혼란이나 분노의 감정, 심각한 갈등을 겪을 때마다 안경을 벗는 지진희의 행동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답답한 심경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6회를 기점으로 지진희의 스타일 변화 역시 돋보였다. 극 중 박훈(장준하 역)의 죽음으로 자리의 무게를 뼈아프게 깨달은 박무진이 각성한 날이었다. 지진희는 깔끔하게 올려 넘긴 헤어스타일로 박무진의 진화를 고스란히 나타냈다.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행보를 그려나갈 그의 강한 의지가 느껴져 다음 전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이날 지진희의 달라진 모습을 본 네티즌들은 “멋있다”, “박력 넘친다”는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시그니처 2. 목소리 + 화법 무엇보다 지진희는 묵직한 목소리 톤과 정확한 발음, 발성 그리고 리더의 품격이 느껴지는 ‘박무진 표 화법’으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지진희만의 독보적인 화법은 드라마의 몰입도를 상승시키고 캐릭터의 매력을 살리는 힘. 감동을 주는 명대사들을 쏟아낸 비결도 여기에 있다. 지진희는 데이터를 중요시하는 과학자 출신답게 “사실입니까”, “합리적인 추론은 뭡니까”를 비롯해 “~할 겁니다”, “~하네요” 등의 의문형, 동의형 및 공감형 화법을 많이 구사하는데,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정중하게, 천천히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입장을 말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특히 의견이 평행선처럼 맞설 때, 한발 물러서 기다리다가 명확한 원칙을 근거로 설명하는 현명함이 매력을 극대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지진희는 온화함과 단호함을 오가는 억양으로 긴장감을 불어넣기도 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며 각 상황을 자연스럽게 묘사했다. ◆시그니처 3. 눈빛 외 아울러 눈빛, 시선처리, 표정, 손짓 등의 비언어적인 부분까지 탁월하게 활용하며 시청자들과 섬세하게 교감하고 있는 지진희. 특히 청와대 혹은 집, 등장하는 공간이 한정적임에도 불구하고 매회 다채롭게 느껴지는 지진희의 눈빛 연기가 압권이다. 혼란, 슬픔, 고뇌, 결의 등의 감정을 빈틈없이 담아낸 지진희의 얼굴과 눈빛은 그 자체만으로 개연성을 부여하며 보는 이들의 감정이입을 저절로 끌어냈다. 회의 장면에서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말하기 태도 역시 장면을 구현해내는 지진희의 디테일한 연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처럼 하나하나 노력이 집약된 연기로 지진희는 화면 밖 시청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작품을 향한 진심과 열정 어린 연기로 ‘60일, 지정생존자’라는 인생작을 완성 중인 지진희가 남은 6회 동안 보여줄 활약에 귀추가 주목된다. tvN 월화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는 매주 월, 화요일 오후 9시 30분 방송.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유관순부터 이한열까지…그 희생은 청년정신이 밑바탕”

    “유관순부터 이한열까지…그 희생은 청년정신이 밑바탕”

    “유관순, 김상옥, 조명하, 이봉창, 윤봉길, 조소앙, 신채호, 장준하, 박종철, 이한열 등 헤아릴 수 없는 보통 사람의 희생은 그 시대의 청년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손자 조인래씨는 지난 14일 중국 항저우에서 외교부가 개최한 ‘한중 우호 카라반’ 역사문화콘서트에서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는 한국 청년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조씨는 “지난 100년의 역사는 동아시아 전체 민족독립운동 역사이기도 하고 민주화 역사이기도 하다”며 “그 역사의 주역은 청년이었다. 청년 시대의 역사이기도 하다”고 했다. 조씨는 조소앙 선생이 제창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과 건국강령의 기초가 된 ‘삼균주의’를 설명하며 “세계 피식민지 독립운동사에서 우리 임시정부처럼 이념과 정책을 제시하면서 광복 운동을 전개한 사례는 전무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독립운동가가 꿈꾼 건 모두가 균등하게 잘사는 나라였다”며 “여러분이 꿈꾸는 것은 주권이 바로 서는 대한민국일 것이다. 그 중심은 여러분 청년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씨는 “지난 100년의 역사가 준 교훈을 새기며 그 시대의 청년정신을 또 다른 청년정신으로 만들어 후대에 유산으로 남겨 달라”고 당부했다. 통일이 되기 전에는 진정한 독립이 이뤄진 게 아니라는 조씨는 “얼마 전 김구 선생 70주기였는데 71주기 때는 통일이 와서 기분 좋게 술 한 잔 부어 드리겠다고 다짐했었다”며 “여러분이 그 꿈을 이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한편 장하성 주중 대사는 지난 16일 상하이에서 ‘한중 우호 카라반’ 만찬 행사에 참석한 독립유공자 후손을 만나 “독립운동을 해 주신 선열의 후손이 너무 오랫동안 국가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쉽고 죄송하다”며 “지금부터라도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장 대사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계시기 때문에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존하는 데도 큰 힘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100년 전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며 감사를 표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외교부 공동취재단
  • 가짜가 숨진 독립군 행적 도용 유공 혜택… 보훈처 색출 소극적

    가짜가 숨진 독립군 행적 도용 유공 혜택… 보훈처 색출 소극적

    지난해 10월 국가보훈처 국정 감사에서 고용진(55)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은 김태원을 거론하며 보훈처의 부실 서훈 은폐 의혹을 따졌다. ‘김태원 서훈’ 논란은 그의 후손들이 이름만 같은 다른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도용한 것으로 의심받는 대표적 사례다.17일 보훈처 기록 등에 따르면 대전 출신 김태원(1901~1951)은 열일곱 살이던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가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그 산하에서 활동했다. 1922년 평안북도 삭주로 침투해 일본경찰 4명을 사살했다. 특수전 부대라고 할 수 있는 ‘벽창 의용단’을 조직한 뒤 평북 의주와 평남 대동 등지에서도 일본인을 살해했다. 1926년 신의주에서 체포돼 같은 해 5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평양 감옥에 수감돼 죽음을 기다리다가 천우신조로 탈옥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임정 요원으로 활약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2015년 대전 지역 시민단체와 언론 등에서 “그가 평안북도 출신 김태원(1903~1926)의 공적을 가로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전 김태원은 생년월일과 가족 관계 등이 보훈처 자료 내용과 판이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평북 김태원은 1926년 검거 당시 사형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대전 김태원은 평북 김태원의 행적을 차용한 뒤 “사형 집행을 앞두고 기적적으로 탈출했다”며 결말만 바꿨다. 1963년 대전 김태원의 후손들이 평북 김태원의 활동을 가져와 연금 등 보훈 혜택을 받았다. 재검증에 나선 국가보훈처는 유족 등록을 취소하고 최근 5년간 지급된 보훈연금도 반납하라고 결정했다. 대전 김태원의 후손들이 각종 혜택을 받아온 지 50년도 훨씬 지난 뒤였다. 대전 김태원의 아들 정인씨는 지금도 독립유공자 후손 자격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이사직을 맡고 있다. 문제는 보훈처가 대전 김태원 논란이 불거지기 4년 전인 2011년부터 이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훈처 자료에는 “1963년 독립장을 수여한 김태원은 평북 신의주 출신인데, 독립유공자로 등록한 김태원은 대전 출신이다. 생년과 본적, 사망일시가 다르고 인척관계도 상이하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보훈처는 “2011년 당시 상황을 확인할 기록이나 서류, 담당자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정부가 가짜 독립유공자를 솎아낼 의지가 진짜로 있는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일본군 출신 한국인 광복군 위장 대전 김태원 논란은 그간 가짜 유공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보여 준다. 대한민국에 가짜 독립유공자가 많다는 지적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한국광복군 지원 업무를 맡았던 왕지셴 전 상교(대령)는 1994년 월간지 ‘말’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에 있던 한국인 91명이 ‘비호대’란 단체를 결성해 중국군 9전구(후난성 소재) 사령관을 돕고자 항일전투에 참가했다던데 사실인가”라고 묻자 “비호대란 단체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나 같은 정보장교도 9전구 사령관을 만나기 힘들었다. 한국광복군 중에서는 만난 이가 거의 없다”면서 “비호대 조직설은 거의 상상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일부 한국인이 검증되지 않은 단체 이름을 지어내 독립유공자 행세를 해왔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또 독립운동가 박주대(1924~2000)가 대만성 행정장관공서(일본 패배 뒤 국민당 정부가 설치한 통치기구)가 발행한 ‘한국임시정부 및 광복군 관할 각부 인수표’를 근거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대만성 정부나 행정장관공서는 광복군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고 토로했다. 대만성은 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대만이 자신과 관계도 없던 한국광복군 관련 자료를 정리해 따로 보관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왕 전 상교는 한국에서 가짜 독립투사가 대거 등장한 이유로 1945년 해방 뒤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한국인이 광복군으로 들어가 ‘신분 세탁’에 나섰기 때문으로 봤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1918~1975)의 장남 호권(70·광복회 서울지부장)씨도 엉터리 독립유공자의 유래를 사이비 광복군에서 찾는다. 일본군이었다가 해방 뒤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떠돌던 이들 상당수가 귀국해서 광복군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작성된 임정 문서에는 광복군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돼 있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김득명(1923~2009)은 “이것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타내려고 상당히 부풀린 수치”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현재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600명에 달한다. 이 때문에 “광복군 상당수가 가짜”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보훈처 공적심사도 가짜 유공자 양산 한몫 일각에서는 독립유공자 제도를 처음 실시한 1960년대부터 브로커와 보훈 담당 직원 간 ‘검은 거래’를 통해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돈을 받고 내주는 일이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2017년 “자신의 당숙(아버지의 사촌형제)이 보훈연금을 타내려고 증조부 김정필(1846~1920)을 독립유공자로 둔갑시켰다”고 폭로한 김종갑(77)씨는 “1991년 정부가 증조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면서 후손들에게 증조부의 행적을 확인하거나 재조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화 한 통도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윤교병(1881~1930)의 손자인 윤석경 전 광복회 대전충남지부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다. 특히 돌아가신 분들이 북한에 있으면 당시로서는 연고 확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부 보훈 담당 공무원들이 대한민국 내 동명이인이나 이름이 비슷한 사람에게 해당 정보를 넘겨줬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윤 전 지부장은 “정부는 행정체계가 미비하던 1960~70년대에 가짜 독립유공자가 많이 생겨났을 것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1980년대 이후에 더욱 많을 것”이라면서 “당시 유공자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자신의 할아버지 공적을 새로 찾아냈다며 등록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랫동안 무연고로 있던 유공자의 가짜 후손으로 등록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껏 정부가 가짜 유공자 색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에 대해 “1만 5000명이 넘는 독립유공자를 전수조사하는 것이 힘든 작업이기는 했다. 부득이하게 선배 공무원들의 과오를 들춰내야 하는 것도 불편한 일이었다”면서 “이 때문에 (정부가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담당자가 바뀌었고 후임자에게 인수인계가 안 되는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현재 학계 등에서 추정하는 가짜 독립유공자 수(100명 이상)는 우리나라 전체 서훈자 1만 5000여명과 비교하면 극히 일부다. 우리 정부가 독립유공자 선정 과정에 구조적으로 개입해 비리를 저질렀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면서도 “그럼에도 전체 독립유공자 가운데 3분의1가량이 아직도 후손을 찾지 못했다. (이들의 공적을 도용해 가짜 유공자가 된 사례는 없는지) 전수조사로 확인해 우리나라 서훈체계의 미흡한 점에 대해 이번 기회에 정확히 짚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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