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경제, 답은 있다] 오너家 비선 경영 탈피… 反재벌 정서 털어내자
세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1위, 메모리 반도체 부문 1위, TV 1위…. 삼성전자가 보유한 기록이다. 삼성은 연간 매출 200조원, 영업이익 25조원의 초우량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으로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공을 세웠지만 재벌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가장 먼저 타도의 대상에 오르는 기업이기도 하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고 산업 전반에 구조조정이 재편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최순실 사태로 인해 국민들의 반(反)재벌 정서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전문가들은 “기업 안팎으로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여러 강소 기업이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독일과 달리 스웨덴은 우리처럼 재벌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스웨덴의 대표적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은 우리나라에서 삼성이 갖는 영향력 이상을 지니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에릭슨(정보통신), 사브(자동차·비행기 엔진), 스카니아(트럭), 일렉트로룩스(가전), ABB(전기·기계), SEB(금융) 등 12개 대기업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 기업이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 시가총액은 주식시장 전체의 50%에 달한다. 발렌베리 가문은 150년 동안 5대에 걸쳐 거대한 경제왕국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국민들 사이에 반재벌 정서는 거의 없다.
기업의 경영 성과와 지배구조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수익에 대한 사회 환원이 제도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재벌 기업들은 계열사마다 전문경영인이 있지만 그룹 전체의 전략을 세우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미래전략실(삼성), 정책본부(롯데) 등 법적 지위가 없는 소수의 그룹 관계자들이 모여 의사결정을 한다”면서 “이런 회의체는 오너의 지시를 받고 수행하는 역할에 그치기 때문에 투명성은 물론이고 전문성도 모자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스웨덴은 기업 이사회에서 결정한 모든 내용이 투자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된다. 또 그룹의 사회공헌재단들이 지주회사와 자회사의 대주주로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 기업의 성과가 자연스럽게 사회에 환원되도록 하고 있다. 예컨대 크누트 앤 앨리스 발렌베리 재단(40%), 마리앤느 앤 마르쿠스 발렌베리 재단(3.5%), 마르쿠스 앤 아말리아 발렌베리 추모재단(2.6%) 등은 모두 인베스터(발렌베리 지주회사)의 대주주다. 이런 제도 덕분에 발렌베리 가문의 기업들은 해마다 수조원대의 수익을 창출하면서도 스웨덴 10대 부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없다. 10대 재벌의 오너들이 상위권을 싹쓸이하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성적표를 받아 보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미래에 대한 전략이 부족하다는 점도 한계점으로 꼽힌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발간한 ‘연구개발(R&D) 투자 보고서’(2016년)에 따르면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등은 매출 등 영업실적에서는 높은 점수를 유지하고 있지만 미래에 대비한 R&D 투자는 적다. 삼성전자가 지난 5년간 매출 대비 설비투자에 들인 비용은 평균 12.2%를 기록했지만 같은 기간 R&D 투자 비용은 6.9%에 그쳤다. LG전자는 6.1%, 현대차는 2.2%로 인텔, 알파벳(구글 지주회사), 페이스북 등의 R&D 투자가 각각 21.9%, 16.0%, 26.9%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 연구위원은 “국내 최고 기업들이 20~30년 뒤를 내다보는 미래 분야 투자에는 인색하고 당장 수익을 내는 비즈니스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위기 극복의 대표적인 사례는 가까운 일본 도요타 자동차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과잉생산, 환율 악화 등으로 4600억엔(약 4조 7000억원)의 적자를 낸 데 이어 2010년 렉서스 차량 1000만대를 리콜 처분하며 4위로 내려앉았던 도요타는 지난해 28조 4031억엔(약 310조원)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극적으로 1위를 탈환했다. 도요타는 당시 추진 중이던 글로벌 생산 공장 추가 건설과 신차 개발을 전면 중단하고 생산 플랫폼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세계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요타는 기존의 성공 모델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한 구조개혁을 단행했다”며 “첫째 R&D 투자, 둘째 협력업체와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BMW, 벤츠, 도요타의 경우 협력업체들과의 관계가 우호적인 대표적 기업으로 손꼽힌다.
기업에 대한 지나친 규제가 외려 다양한 분야의 투자를 가로막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는 대기업들이 투자하는 데 제약이 심하다”면서 “대표적인 것이 대형마트 규제”라고 지적했다. 수출과 내수 모두 움츠러든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기업들을 옥죄는 식의 규제를 한다는 것이다. 대형마트 출점 규제를 엄격하게 적용했던 프랑스도 최근에는 경제활성화를 위해 유통업 규제를 완화하는 추세다. 배 부원장은 “투자 여건이나 노사 관계 등을 경제적 문제로 따지기보다 이념적이거나 정파적 이슈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라며 “재벌 개혁도 일자리나 투자 확대 등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 기업들을 겨냥한 전 세계 헤지펀드들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차등의결권’(일부 주식에 특별히 많은 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 등 경영권 방어장치 도입도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우리나라도 삼성전자가 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공격을 받는 홍역을 치르면서 차등의결권 제도의 필요성이 크게 부각됐지만 ‘재벌 개혁 선행’이 먼저라는 반대에 부딪혀 진척이 없는 상태다.
오너 가문이 스스로 자체적인 능력 검증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앞서 발렌베리 가문은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도움 없이 명문대 경영전문대학원(MBA)을 졸업하고 외국 유학을 마칠 것 ▲해군 장교로 복무할 것 ▲10~20년간 발렌베리 계열사가 아닌 금융기관에서 실무 경험을 쌓을 것 등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또 항상 2명의 리더를 둬 잘못된 판단 가능성을 줄이고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 소장인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주주, 채권자, 노동자 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드는 방식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올바른 기업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