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중독이 나라 망쳐… 새 대통령 적재적소 인사로 국민통합을” [이순녀의 이사람]
흑백논리 정치가 분열·대립 몰아대통령중심제 자체 한계도 원인국힘 단일화 사태도 권력욕 기인민주 ‘사법부 흔들기’ 정도 벗어나새 정권 전문가 중용사회 됐으면 ‘보은 떡고물’ 없어져야 국가 살아돈 많은 사람 세금 많이 내게 해야 종교는 정치의 윤리에만 관심을90도로 허리를 숙인 사내의 등 위에 거대한 산봉우리 세 개가 올려져 있다. 손봉호(87)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회고록의 표지 그림이다. 책 제목도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다. 철학자이자 시민운동가,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는 기독교인으로 고통받는 약자와 그늘진 곳을 두루 살피며 우리 사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이미지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 온 우리 시대의 참 스승인 손 교수를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밀알학교에서 만났다.
-계엄과 탄핵, 조기 대선 정국 등으로 반년 가까이 나라가 큰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과학기술, 문화예술 분야 등에선 상당한 선진국이지만 딱 하나 뒤처지는 것이 정치 수준입니다. 사회를 통합하고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가 외려 국민을 분열시키고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어요. 중간을 인정하지 않는 흑백논리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세상을 선과 악, 두 개의 잣대로만 보면 극단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선과 악이 섞여 있는 복잡한 현실에선 절제와 겸손이 필요한데 지금 우리 정치인들에겐 그런 인식과 실천이 크게 부족합니다.”
-보수 지지층에서도 국민의힘에 실망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워낙 큰 잘못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한 절대 힘을 얻을 수 없어요. 권력에 눈이 멀면 뻔히 보이는 것도 무시하고 잘못된 전략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번 후보 단일화 사태도 당 내부에서 서로 권력에 욕심을 내다가 분열한 것이라고 봐요. 권력과 연관되면 체면이고, 윤리고 다 깔아뭉갤 수 있다는 걸 보여 줬습니다.”
-대법원의 파기환송심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사법권 침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큽니다.
“사법부 판결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전제니까요. 하지만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사법부를 흔드는 것은 상식과 정도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사법부의 권위를 떨어뜨려서 국가와 국민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판결이 민주당에 유리하게 나왔다면 가만히 있었겠지요. 입법권을 쥐고 있다고 해서 이렇게 염치없이 정치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과도한 권력 지향성이 문제라고 지적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권력욕은 누구에게나 있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현상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와 수준이 문제라고 봐요. 우리나라는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만큼 권력에 집착합니다. 권력을 획득한 사람들이 특혜를 독점하고, 권력을 잃은 사람들은 억울하게 박해를 받았던 역사적 경험들이 쌓여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신중하게 권한을 행사하고, 겸손하게 정치를 했다면 이 정도의 권력 중독과 정치 과잉은 없었을 겁니다.”
-대통령 중심제의 한계도 정치 양극화의 원인으로 꼽으셨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워낙 막대하니까 그 밑에서 떡고물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니 정치에 관심을 갖는 국민도 늘어나게 됩니다. 안 그래도 권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에서 선거의 승패로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정치 제도는 맞지 않아요. 대통령 중심제를 지속하는 한 극단적인 정치 대립과 불안은 계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개인적으로는 내각책임제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새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국민통합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인사권을 제대로 행사해야 해요. 국민이 보기에 ‘그 자리에 충분히 앉을 자격이 있다’고 수긍할 만한 인물을 뽑아야죠. 예전에 네덜란드에서 공부할 때 내가 다니던 대학의 교수가 총리 자리를 제안받았는데 자기는 경제 전문가니까 중앙은행장을 하겠다고 해서 놀랐던 적이 있어요. 전문가를 중용해야 능력 위주 사회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는 지금보다 훨씬 조용해지겠죠.”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쉽지는 않겠지요.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겠습니까. 보은하겠다며 그 사람들에게 떡고물을 나눠 주지 말아야 자기도 살고, 나라도 사는데 그렇게 해본 대통령이 없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나마 제일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러다간 대한민국이 소멸할 것이란 암울한 경고까지 나오고 있는데요.
“가장 큰 걱정거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야지요. 사교육에 돈을 쓸 필요가 없게 대학입시제도 등을 바꾸고, 주택 공급과 돌봄 제공 같은 출산·육아 지원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프랑스처럼 출산율이 반등한 나라들의 선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 갈등도 커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빈부격차를 줄이려면 제도적인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자꾸 세금 감면, 세금 감면 하는데 나는 돈 많은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게 해야 한다고 봐요. 그렇게 재원을 만들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복지 혜택을 줘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장애인 비율이 전체 인구의 5%인데 미국은 28%, 캐나다는 27%입니다. 장애인 기준이 다르기 때문인데, 국가가 보호하는 국민의 범위를 늘려야 합니다. 다만 현금을 나눠 주는 복지는 반대합니다. 자립할 수 있는 기반과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탄핵 반대 등 일부 보수 개신교 단체의 정치 집회가 논란이 됐습니다. 기독교계 원로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종교는 정치의 윤리적 측면에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치가 인권을 무시하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를 할 때 비판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종교의 영역이 아닙니다. 대통령 탄핵 문제도 성명서 정도는 발표할 수 있겠지만 대중들을 모아 놓고 고함을 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려면 구성원들이 어떤 점을 특히 유념해야 할까요.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정치인과 공무원의 거짓말은 절대 용서해선 안 됩니다.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유튜브도 발을 못 붙이게 해야지요. 언론의 역할이 무엇보다 큽니다. 팩트체크를 철저히 해서 사실과 사실이 아닌 내용을 분명히 가려 주길 부탁합니다.”
-최근에 회고록을 내셨습니다. 책 제목은 어떻게 정하신 건가요.
“재미 화가인 김원숙 화백이 1995년에 나를 보고 ‘산을 옮기는 사람’이라며 그려 준 그림에서 제목을 가져왔습니다. 제대로 실천은 못 했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고통받는 약자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고자 했던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사장 직함이 한때 20개일 정도로 각종 시민단체, 복지기관, 기독교 단체 등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떤 활동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공익 단체를 만든 뒤 나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데 해 줄 건 별로 없고 이름이라도 빌려주자 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가장 관심을 기울인 건 장애인 권익 보호 운동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1973년에 귀국했는데 당시 지식인 사회에선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가장 고통받는 이들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장애인들이 그들보다 더 힘든 이들이라고 생각해서 장애인 단체를 찾아가 조금씩 도와줬어요. 우리나라에 장애인 복지랄 게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지요. 1979년 장애인 복지단체 밀알 창립 때 고문을 맡았고, 이사장으로 있던 1996년에 자폐아동을 위한 밀알학교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설립했습니다. 그 후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장애인 학교를 세우기 위해 학부모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 현실은 그대로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기부와 나눔 운동에도 특별한 관심을 쏟으셨는데요.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선이라고 합니다. 나는 행복 추구보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 인간을 더 이롭게 하는 선한 행동이라고 봅니다. 특히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는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똑같은 빵이라도 굶주린 사람과 배부른 사람이 느끼는 가치는 아주 다르지 않습니까. 타인의 고통이 줄어들면 나와 내 가족이 고통을 당할 가능성도 줄어듭니다. 기부를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줄이는 행동은 그런 측면에서 합리적 이기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일을 좀더 하고 싶으신가요.
“환경보호에 더 힘을 쏟을 것 같습니다. 20년 전쯤 집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들인 이후로 전기료 걱정을 한 적이 없고, 전기차를 탄 지도 10년이 될 정도로 남들에 비해선 환경운동을 열심히 한 편이긴 합니다. 하지만 요즘 기후변화 등 환경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걸 보면 훨씬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손봉호 명예교수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서울대에서 20여년간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다. 한성대 이사장, 동덕여대 총장 등을 지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명선거시민운동협의회, 밀알복지법인, 샘물호스피스, 국제기아대책기구 등 각종 사회단체를 이끌며 약자 보호와 나눔을 실천했다. 현재 교육의봄, 푸른아시아, 장기려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이순녀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