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 화해의 길] (4) 참 종교인의 삶
나는 학계에서 종교다원론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그러나 이 세상에 종교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인류 공존과 평화의길을 모색하자는 것이 종교다원론이라면,나는 기꺼이 종교다원론자가 되겠다.그것이 혹시 내가 소속돼 있는 기독교의 어떤 교리를 어기는 것이라 해도,나는 한 종교의 ‘교리’보다 내가 생각하는 ‘진리’ 쪽에 서기를 망설이지 않을것이다.물론,지금 내가 진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나중에진리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난다 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진리인 바를 좇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를 배타하며 경우에 따라전쟁까지도 사양치 않는 기독교 신자로 남을 것인지,아니면 다른 종교인들을 형제로 여기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과전쟁을 하지 않는 대가로 기독교 신자의 자격을 박탈당하든지,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물론 기꺼이 후자를택할 것이다.왜냐하면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전에 사람이고,따라서사람답게 사는 것이 기독교 신자답게 사는 것보다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하기를,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안식일 대신 기독교(종교)를 넣어도 말이 성립된다고 나는 믿는다.기독교(종교)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기독교(종교)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이 진실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해서 오늘도 지상에서는 이른바 종교분쟁이라는 불행한 드라마가연출 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고 말했는데,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답게 사는 삶과 사람답게 사는 삶이 서로 다르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드러난 현상을 볼 때,간혹 다른 종교를 배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인 양 주장하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있기에,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다른 종교를 배타해야한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라면,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진실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른 종교를 배타(排他)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의미로 ‘하나’라는 말을 쓴다.우선 하나,둘,셋,하고 수를 헤아릴 때 쓰는 ‘하나’가 있는데 이때의 하나는 상대적인 하나다.이 하나에는 하나 아닌 다른 것들이 무수하게 있을 수 있다.그러나,존재 가능한 모든 것을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으면 결국 옹근 ‘하나’가 된다.이‘하나’에는 상대할 만한 다른 무엇이 없다.그래서 절대적인 하나다.절대적인 하나에는 ‘밖’이 없다.모든 것이 그속에 들어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존재 가능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상대적인 분이 아니라 절대적인 분이다.만일 하느님 밖에 무엇이 따로 있다면 그 하느님은 상대적인 존재로 되고 따라서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느님이 아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므로 하느님을 믿는다.하느님을 믿는다는말은 그 분 앞에서 어느 것도 타(他)일 수 없는 절대적인하느님 안에 거(居)한다는 말이다.
그러니,진정한 기독교인에게는 타(他)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배타도 있을 수없다.타(他)가 있어야 배타를 할 것 아닌가?(그런 뜻에서 나의 종교다원론은 종교일원론의다른 이름이다.) 기독교인이 무엇에 대하여 배타를 한다면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그런데도 그것을 주장하고 가르치고 오히려 자랑스레 여기는 자칭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음은,있어도 저렇게 많이있음은,어째서일까?종교는 등산과 같다.종(宗)이 꼭대기 또는 바닥이라는 말이니 종교는 꼭대기 가르침 또는 바닥 가르침이라는 말 아닌가? 가장 높은 자리 또는 가장 낮은 자리로 올라가든지 내려가는 것이 종교인의 길이다.
등산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높이 올라갈수록 눈에 들어오는 세계가 넓어진다.바야흐로 정상에 서면 온 천하가 품에들어와 안긴다.'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다.그러나 기슭에 서면 저쪽 등성이 너머도 보이지 않고 이쪽 언덕 너머도 보이지 않는다.그만큼 딛고 선 땅의 영역은 넓지만 눈에(품에) 들어오는 세계는 좁다.
종교인이란,복잡하고 천박한 앎에서 단순하고 드높은 앎으로 옮겨가는 사람을 가리킨다.따라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본 사람이 아니면 일컬어 종교지도자라는 이름으로 행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오늘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어떤가? 단순하고 드높은 가르침으로 신자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틀에 박힌 가르침으로 신자들을 기슭에 붙잡아두려는 자들이 자칭 지도자로 행세하는 모습만 보이니,이 또한 나의 좁은 시야 탓일까? 길게 말할 것 없다.이번 미국에서 벌어진 테러 참사에 곧장 미국의 보복을 반대하는(적어도 보복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성명 한 줄 발표하지 않은 교단 본부라면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본부가 아니다.어떤 경우에도 앙갚음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을,오늘처럼 그것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에,세상을 향해서 외치지 않는 교회가 무슨 예수교회란 말인가?듣기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크리스천이라고 한다.이번에그가 전쟁 수준의 보복을 다짐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렇다면 이것 하나는 분명히 밝혀진 셈이다.부시는 훌륭한 미국 대통령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결코 진정한 크리스천은 아니다.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전세계의 종교인은 지금 세속권력 편에서 폭력과 증오를 키울 것인지 교주(敎主)가 가르친 진리 편에서 비폭력과 사랑을 지킬 것인지,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긴박한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이현주 감리교 목사.
■이현주목사 ‘종교간 벽 허물기' 앞장. 1944년 충주 태생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한 개신교목사지만 특정 종교에 머물지 않은 채 일상에서 다종교 사상에 바탕한 ‘종교간 벽허물기’를 일관되게 실천하고 있는 독특한 종교인이다.
현재 부인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충남 공주 계룡산 동학사아랫 마을 집에는 십자가와 성모마리아상,불상이 함께 모셔져 있을 정도다.본인의 말대로 90년대 초반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다 교회에서 쫓겨난 변선환 감리교신학대학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77년 감리교 목사가 된 뒤 전도사 시절을 포함해 교회를 맡아 운영한 것은 6년여가 전부.81년 교회에서 나온 뒤 저술과 번역 등 글쓰기와 대학·교회·성당·절 등에서 강의를 지속해왔다.감리교신학대에 재학중이던 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된 뒤 동화작가·번역문학가로도 활동했다.‘이 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를비롯해 ‘사람의 길,예수의 길’‘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칼아 너 갈 데로 가라’‘성서와 민담’‘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그래서 행복한 신의 작은 피리’‘장자산책’‘대학 중용 읽기’‘길에서 주운 생각들’ 등 20여권의 책을 통해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요즘은 티베트 불교에 심취해 있으며 최근 마하트마 간디가 해설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 출간했다.
■‘이 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종교다원주의를 실천해온 이 목사의 지론이 시종일관 철저하게 드러나는 책이다(호미刊).만만찮은 불교 지식과 이해로 석가모니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을 접목시키고 있다.“제 속에는 예수님과 여래님이 나란히 계시거니와 저와 제가하나이듯이 두 분도 그렇게 한 분이신데 저는 저하고 자주갈등을 빚지만 두 분사이에는 도무지 그런 일이 없으시니두 분 사이가 저와 저의사이보다 더 가까우신 것은 분명하다”는 서문의 글은 이 책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첫 장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금강경’의 첫구절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공자님의 가르침이나 모두가 전에 없던 무슨 신통한묘수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부터 그렇게 나있는 길을 일러주신 것에 지나지 않는다.종교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뜨는 것”이라고 밝혀 그의 매이지 않은 종교관의 근저를 짐작케 한다.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부처님과 예수가 만난다.‘내가 나인 줄로 알고 있는 나,즉 아상(我相)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는 석가모니의 말씀과 ‘당신을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죽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같다는 것이다.불교사상 중 ‘중생의 멸도(滅道)'와 기독교의 ‘세상의 구원’도 이 책에서는 한 지점에서 만난다.‘아상’을 버림으로써 ‘거듭나고’‘멸도’함으로써 구원을 이룬다는 점에서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은 하나이며 그바라는 세상도 같다는 것이다.결국 부처와 예수라는 역사적으로 다른 두 존재가 ‘발견’한 것이 실은 역사를 관류하는동일한 하나의 진리라는 것이다.그러기에 부처와 예수는 불교와 기독교라는 굳은 격자 속에 갇힌 죽어버린 존재가 아님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김성호기자 ki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