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높은 기표 책상, ‘무용지물’ 보조용구… 험난한 장애인 ‘한 표’

너무 높은 기표 책상, ‘무용지물’ 보조용구… 험난한 장애인 ‘한 표’

손지연 기자
손지연 기자
입력 2024-04-11 03:19
수정 2024-04-11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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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총선 휠체어 장애인 동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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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 장애인 김명학씨가 투표를 위해 10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주민센터에 전동 휠체어를 탄 채 들어가고 있다.
뇌병변 장애인 김명학씨가 투표를 위해 10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주민센터에 전동 휠체어를 탄 채 들어가고 있다.
선거에 참여하는 일은 국민이 갖는 기본권이지만 유독 장애인은 그 한 표를 온전히 행사하기가 어렵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인 10일 뇌병변 장애인인 김명학(66)씨가 투표를 하며 제공받았던 보조 서비스는 기표대(투표용지를 올려 두고 표기하는 곳)보다 조금 큰 ‘대형 기표대’ 단 하나뿐이었다.

●입구엔 안내 돕는 사무원 없어

이날 오전 7시 김씨는 서울 종로구 이화동 자택에서 활동지원사 박모(63)씨와 함께 5분 거리에 있는 투표소로 향했다. 김씨는 “투표 시작 시각인 6시에 가면 오히려 사람이 많을 때도 있어서 7시쯤에 가는 게 (휠체어를 타고) 투표하기에 편하다”고 말했다.

투표소에 도착한 김씨는 투표를 보조해 줄 투표 사무원을 만나지 못했다. 공직선거관리규칙에 따라 투표소 입구에는 장애인 등 이동 약자를 보조할 투표 사무원이 배치돼 있어야 하지만 이날 사무원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장애인 기표대’ 높이 조절 안 돼

한참을 서성이던 김씨는 선거 사무원의 안내로 휠체어 장애인을 위해 마련된 대형 기표대로 향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모든 투표소에는 대형 기표대가 마련됐다. 하지만 정작 휠체어에 맞춰 책상의 높이를 조절하는 건 불가능했다. 김씨는 “책상이 너무 높아서 불편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기표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전했다.

●보조용구 도입 사실도, 사용법도 몰라

또 장애인을 위한 ‘기표 보조용구’ 관련 안내문이 투표소 안에 붙어 있었지만 선거 사무원도, 장애인도 도입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김씨도 기표 보조용구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투표소에 있던 관계자도 김씨에게 별도 설명을 하지 않았다.

올해 처음 도입된 장애인용 기표 보조용구는 투표용지를 플라스틱판에 끼우고 상하로 움직여 버튼을 누르면 기표 도장이 찍히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근력이 약한 장애인이 정확한 위치에 쉽게 기표하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김씨는 “사전투표를 끝낸 장애인 지인 중에 기표 보조용구를 사용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관계자도 도입 사실을 모르고, 사용법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투표지 간격 너무 좁아 기표 어려워

김씨가 투표를 마치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 그동안 비장애인 유권자 5명이 투표를 마치고 돌아갔다. 김씨는 “투표용지가 너무 길어 다 읽고 투표용지를 접는 데 오래 걸렸다”며 “비례대표 투표용지 간격이 너무 좁아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38개 정당이 표기돼 길이가 51.7㎝에 달하는 비례대표 투표용지는 위아래 간격이 좁다. 장애인의 경우 정확한 위치에 기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선거 이전부터 나왔지만 시각장애인용 점자 투표용지 외에 별도의 장애인용 투표용지는 제공되지 않았다.

김씨는 “4년 전 총선 때는 승강기가 없어서 선거 사무원들이 기표대를 들고 1층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오늘은 그나마 편하게 투표할 수 있었다”면서도 “경사진 곳에 있어서 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투표소도 아직 있다.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하는 게 여전히 저에게는 어려운 일”이라고 전했다.
2024-04-1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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