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3차 핵실험 이후] 한국 핵개발 역사

[北 3차 핵실험 이후] 한국 핵개발 역사

입력 2013-02-16 00:00
수정 2013-02-1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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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미군 일부 철수하자 핵무기 제조 지시 · 전두환, 美 압력에 중단…노태우 비핵화 선언

핵무장론을 계기로 우리의 핵개발 역사와 수준도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 말부터 핵개발을 시작했다. 원자력 발전 등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평화적 목적의 핵개발이 주를 이뤘지만 1970년대에는 주한미군 철수 이후 자주국방 차원에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기도 했다.

56년 2월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과 한·미 원자력협정을 맺었다. 미국이 원자력 발전 기술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58년 원자력법을 만들고 연구용 원자로 도입을 추진한다. 59년 당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를 세우고, 3년 뒤인 62년 미국으로부터 100㎾급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가 마크 2호’를 들여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70년대에는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71년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시키자 안보 불안을 느끼고 72년 초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술력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 추진을 여러 번 강조했었다. 우리나라는 75년 4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정식 가입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2개월 뒤 외신과의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핵무기의 개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은 77년 5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도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 능력은 있다. (미국이) 핵을 거둬간다면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압력으로 핵무기 개발사업을 중단했고 노태우 정권은 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플루토늄 추출 실험과 우라늄 분리실험을 하기도 했다. 우리 핵 과학자들은 2000년 1∼2월 대전 원자력연구소에서 0.2g의 저농축 우라늄을 분리했다. 이로 인해 2004년 9월부터 2007년까지 국제원자력기구( IAEA)의 사찰을 받기도 했다.

당시 학문적 탐구활동이라고 해명했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싸늘했다. 외신들은 “한국이 핵개발에 나섰다”고 연일 대서특필했다. 특히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프랑스 등 이른바 ‘핵 비확산’ 주창 국가들은 한국이 우방이라도 ‘이중잣대’를 적용할 수 없다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를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외교관은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국가이익만이 있을 뿐이라는 교훈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효섭 기자 newworld@seoul.co.kr

2013-02-16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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