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김용택 시인의 ‘그여자네 집’에 나올 것만 같은 제주 올레길 16코스에서 만난 감나무 집. 제주 강동삼 기자
# 올레길을 걷다가 문득, 김용택 시인의 ‘그여자네 집’을 만납니다우리는 누구나 내 마음 속의 집을 갖고 있다. 마치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처럼. 제주의 올레길을 걷다가 그런 집을 만난다. 골목 어귀에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집이기도 하고, 길 모퉁이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짖어대는 마당이 보이는 집이기도 하다. 혹은 마당 한 편에 대봉도 아니고 홍시도 아니고 단감도 아닌 ‘갈중이(갈옷)’를 염색할 때 쓰는 ‘땡감(제주도 토종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붉게 익어가고 있는 집을 만날 수 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노랗게 물드는 집/해가 저무는 날/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생각하면 그리웁고/바라보면 정다웠던 집/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불빛이,/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그 불빛 아래 앉아/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그 여자 아버지와/그 여자 큰 오빠가/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지붕을 이는 집/노란 초가집/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잘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참견하고 싶었던 집/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길을 걸으며 길을 찾는다. 길 위에서 삶의 ‘길’을 얻는다. 제주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 틈에 처음으로 끼고 걷는다. 바다를 끼고 돌고 바닷가 몽돌 해변을 지나고 야생화가 핀 언덕을 지나고 바닷가 마을을 지난다. 제주의 속살들을 지나다가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난다. 애월읍 ‘수상한 빵집’ 언덕길을 지나가다가 감이 붉게 익는 집들을 지난다. 집집마다 감나무들이 시골 정취를 더하는 조용한 마을 예원동을 지난다.
올레 16코스 고내포구 길을 걷는 올레꾼들. 제주 강동삼 기자
고내포구의 등대. 제주 강동삼 기자
박진택 제주올레완주자클럽회장, 올레길에서 만난 사람들 배낭에 매달린 완주메달들. 제주 강동삼 기자
# “차를 타고 가다 만나는 제주올레보다 걷다가 만나는 제주의 속살을 만나면 행복합니다”
<45>16코스 올레길 물메오름
첫날 14코스를 걷고 근무 때문에 15코스를 건너 뛰고 16코스 걷기에 동참한 길이었다. 고내리포구로 가는 길에서 제주올레 21코스(27개코스) 437㎞를 한번도 아니고 14번을 완주한 박진택(70) 제주올레완주자클럽 회장을 만났다.
그는 일흔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건장한 체격과 건강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주 올레를 ‘건강과 힐링’ 때문에 걷는다는 그는 “저마다 아픔을 안고 걸어간다. 모두 다 사정이 안고 걷고 병을 안고 걷는다. 마음속 응어리를 안고 걷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걷고 고혈압과 당뇨를 앓며 걷는다. 그러다가 건강을 찾고, 그러다가 힐링(치유)을 하게 된다”며 “차를 타고 다닐 때 느끼지 못한 제주, 걷다가 만나는 제주의 속살을 만나 행복하다”고 웃는다.
올레코스 중 강추하고 싶은 코스를 꼽아달라고 하자 “다 좋다. 그러나 특별히 처음 걷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길은 6코스란다. 신발 벗고 걷는 표선 4코스에선 피곤한 발을 바닷물에 적시며 걸어서 좋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너번 완주해선 몰라. 완주를 7번쯤 해야 어디쯤 뭐가 있는지 알게 되고 제주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고 강조한다. 이제 첫발을 뗀 내겐 그가 말하는 올레가 저멀리 있는 것만 같다.
그는 “제주 해안가 오름들은 중산간마을에 있는 오름들과 달리 ‘봉’이 붙는다”며 “수산봉, 도두봉, 사라봉, 별도봉, 원당봉…. 왜냐하면 모두 봉수대가 있는 오름이어서 그렇다”고 귀띔한다.
올레길 16코스 고내리 바닷가. 제주 강동삼 기자
올레길 16코스에서 만난 자연 빚은 바위언덕.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올레걷기축제에서 16코스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공연을 펼치고 있는 시니어공연단. 제주 강동삼 기자
# “제주올레 길은 인생과 많이 닮은 길로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시간입니다”‘걸을 맛 난다(A Walk to Savor)’라는 슬로건을 내건 2024년 제주올레걷기축제는 지난 11월 7일부터 9일까지 14코스, 15-B(역방향), 16코스에서 1만여 명의 참가자들이 참여했다.
처음 참가한 사람은 절반인 5000여명을 넘는다. 참가자들의 80% 가까이는 ‘제주올레 길 자체의 매력’(77.8%)’때문에 참여했단다.
일본에서 온 토요시마 시게루씨는 “제주올레 길은 마음이 치유되는 길로 대자연에 녹아들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오랜 시간 제주올레 길을 걸으며 감동적인 순간이 많았는데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제주올레 길은 인생과 많이 닮은 길로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뉴질랜드에서 온 덱 데비씨는 “제주올레걷기축제에 처음 참여했는데 잘 기획된 축제라 3일동안 만족스러웠다”며 “길 위를 걸으며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의 사람들과 이야기 나눈 일, 경쟁이 아닌 자신의 속도에 맞춰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가방에 완주 액세서리를 잔뜩 매달아놓은 이광식(47)씨는 2017년부터 올레를 걷기 시작했단다. 4번 이나 완주한 그는 “처음 걸었던 길이 종달리 바닷가마을이 있는 21코스였는데 가장 애착이 간다”면서 “그래도 올레길에서 단연 으뜸은 7코스로 가장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있어 꼭 걸어보라”고 권유했다.
수산봉 저수지 쪽 인생샷 찍는 그네에서 사람들이 그네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수산봉 400년된 곰솔나무. 제주 강동삼 기자
얼굴에 제주올레 간세표시 페인팅한 올레꾼들. 제주 강동삼 기자
# 수산저수지, 400년 넘은 곰솔나무, 그네 타며 인생샷… 감나무 있는 집들을 만나 행복합니다점심 시간이 될 무렵 16코스에서 가장 큰 고비인 수산봉, 물메오름(애월읍 수산리 산 1-1)을 만난다. 수산리의 옛 이름이 물메(물미)란다. 저수지를 낀 오름이어서 저수지에 물이 찰 땐 수산봉마저 고혹스럽다. 표고 121.5m. 정상이 확 트이지 않아 뷰가 보고 싶어 올라갔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물메오름이라고 불린 이유였던 작은 연못도 메말라 흔적만 남아 있다. 대신 넓은 체육시설과 기상레이더, 정자, 쉼터가 있어 다리를 쉬게 할 순 있다.
수산봉의 백미는 저수지쪽 소나무에 걸려 있는 그네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그네를 탄다. 이른바 인생샷 포토존이다. 400년도 넘은 노송인 곰솔나무(지방기념물 제8호)와 저수지는 한폭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다. 400여년 전 진주강씨 수산파 입도조 강철의 장손인 강우회의 집 뜰에 심긴 것이 그 자리에 거목으로 자란 것이라고 한다. 평상시의 수면 넓이가 1만 2000평(약 4만㎡)에 달하는 수산저수지는 1960년 3년간 공사로 조성됐단다. 지금은 거의 물이 메말라 있어 잔잔한 호반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길 수 없어 아쉽다. 추억 대신 기억하기로 한다.
올레걷기 축제날이어서 그 넓은 저수지에는 사람들이 잔디밭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다. 클로드 모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 하다. 한쪽에선 마을이장이 2행시를 읊으면 이 동네에선 가장 유명한 ‘수상한 빵집’에서 나오는 초당 옥수수찐빵을 나눠준다. 2행시 주제어는 ‘초당’. 기자는 ‘초월했습니다 올레길, 당당하게 완주하겠습니다.’ 라는 낯부끄러운 2행시를 짓고는 펀(FUN)뻔하게 찐빵 두개를 받아 행복해진다.
걷다보니,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걷다보니 행복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다. 돌담을 걸으며 행복했고, 파도가 조각한 주상절리를 보며 행복했고, 길모퉁이에서 만난 할머니가 나눠주는 햇귤의 달콤함에 행복했고, 감나무 집의 소박한 마당에 행복해졌다.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힘들 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나태주 시인의 시 ‘행복’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어서 더욱 행복했다.
이 세가지만 있으면 힘들어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느껴질 만큼 힘들어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제주올레걷기축제에 참여한 올레꾼들이 수산봉으로 가는 시골돌담길을 걷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올레길 16코스 수산봉(물메오름), 수산봉 정상, 수산저수지쪽에서 바라본 수산봉, 16코스 올레길, 올레꾼들에게 감귤을 나눠주는 마음씨 좋은 할머니, 올레길에서 만난 무인카페. 제주 강동삼 기자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항몽유적지 포토존 너머 멀리 수산봉이 보인다. 제주 강동삼 기자
2024 제주올레걷기축제 폐막식이 열리고 있는 항몽유적지. 제주 강동삼 기자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올레걷기축제 폐막식장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에서 사람들이 공연을 보며 쉬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2024 제주올레걷기축제 폐막식이 열리는 곳은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애월읍 항파두리로 50)였다.
제주항파두리 항몽 유적지는 13세기 말엽(1271~1273)원나라 침략에 맞서 궐기한, 그 유명한 삼별초가 최후까지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다.
삼별초는 고려군의 정예 별동 부대로서 고려 원종 11년(1270) 2월 고려 조정이 원나라(몽고)와 강화를 맺자 이에 반대하여 끝까지 대몽항전을 한 ‘호국항쟁의 화신’이다. 이후 삼별초군은 남하하여 진도의 용장성을 근거지로 항전했으나, 원나라 세력에 의해 원종 12년(1271)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 장군이 전사하게 되자 김통정 장군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탐라(제주)에 들어왔다.
김통정 장군은 삼별초군의 거점지인 항파두리에 흙을 이용한 길이 3.8㎞에 달하는 토성을 쌓고 계속 항전했다. 그러나 원종 14년(1273)1만 2000여 명에 달하는 여·몽연합군의 총공격을 받아 항파두성이 함락되고 삼별초 군사들은 전원 순의했다.
공민왕 23년(1374) 최영장군에 의해 몽고인들이 제주에서 완전 토벌될 때까지 100여년동안 원나라의 직할지로 이용되면서 제주도민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지금도 제주인들은 가장 심하게 누군가를 욕할 때 ‘몽고X의 XX’라고 할 정도다.
원나라와 맞서 끝까지 항쟁을 벌인 고려 무인의 드높은 기상과 자주호국의 결의를 오늘날 후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부는 삼별초 유적지를 사적 제396호로 지정했다.
삼별초군의 넋을 기리는 비석도 눈에 띈다. 비석 전면의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란 제자(題字)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란다. 1977년 성곽 일부의 보수와 순의비 건립을 착공, 1978년 6월 준공했다.
지금은 계절마다 양귀비꽃, 유채꽃, 해바라기 등을 심어 올레꾼들을 사로 잡는 곳으로 도민들이 휴일에 소풍가는 명소가 됐다.
한편 제주올레걷기축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목, 금, 토요일 3일 동안 열린다. 내년에는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아직 올레길을 걸어보지 않았다면 내년엔 도전해보자. 17~ 19코스 중 한 곳이라도 완주해 올레 패스포트에 도장 찍어보자. 그렇게 걷다보면 언젠가 437㎞를 다 완주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노지혜 제주올레홍보마케팅실장은 “2024년 11월 21일 기준 제주올레 완주자는 2만 5984명”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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