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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발 딛지 못한 채 유령처럼 사는 사람들…세월호, 언어 근간 흔들다

현실에 발 딛지 못한 채 유령처럼 사는 사람들…세월호, 언어 근간 흔들다

이슬기 기자
입력 2019-10-13 22:12
업데이트 2019-10-14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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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경장편 소설 단행본 ‘크리스마스캐럴’ 출간 하성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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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24년차 하성란 작가는 “사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소설에 대해서는 점점 더 모르겠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젊은 친구들과 합평하면서 젠더 감수성이나 페미니즘 등 많이 배우고 있다”는 그는 그렇게 새로 배운 세상을 소설에 차곡차곡 녹여내고 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등단 24년차 하성란 작가는 “사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소설에 대해서는 점점 더 모르겠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젊은 친구들과 합평하면서 젠더 감수성이나 페미니즘 등 많이 배우고 있다”는 그는 그렇게 새로 배운 세상을 소설에 차곡차곡 녹여내고 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지난해 초, 한 해의 신간 출간 계획을 다루는 기사에 하성란(52) 작가의 이름은 꼭꼭 가 박혔다. 길게는 9년 전부터 문예지와 웹 등에 연재한 ‘정오의 그림자’, ‘여우여자’, ‘여덟 번째 아이’ 등 장편소설 3편이 책으로 묶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고, 더러는 작가의 손에서 계속 수정 중이다.

6년 만에 소설 단행본, 경장편 ‘크리스마스캐럴’(현대문학)을 낸 작가를 최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물었다. 왜 오랜만이냐고. “좋은 소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언어의 근간이 흔들렸다고 생각했다”고 덧댔다.

●세월호 이후 ‘좋은 소설’ 생각 달라져

작가는 참사 희생자들의 약전인 ‘세월호와 함께 사라진 304개의 우주’(2016·굿플러스북) 집필에 참여해 단원고 남학생의 일대기를 그렸다. “아이의 원래 생일이 있고, 배에서 나왔던 날짜가 있어요. 배에서 나온 날짜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게 축하의 의미를 띠는 건 또 아니에요. 이렇게 내가 쓴 문장들이 전과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까 수정 기간이 길어지고, 또 다시 붙잡고,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향후 작가의 출간작들에는 어떤 식으로든 ‘세월호’가 아로새겨질 예정이다.

소설 ‘크리스마스캐럴’은 그런 작가가 세월호 이후 처음 펴낸 단행본이다. 지난해 ‘현대문학’ 11월호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놨다. 소설은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의 첫 문장을 변용하며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그날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우리를 숨죽이게 하기에 충분했다.’(9쪽) 찰스 디킨스의 동명의 소설도 함께 모티브가 됐다.

●헨리 제임스·찰스 디킨스 소설 모티브

크리스마스이브, 한자리에 모인 세 자매의 가족들이 듣게 되는 막내의 기이한 체험이 이야기의 골자다. 2년 8개월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 후 식당 주방 보조 일을 하며 술 없이는 하루를 버티지 못하는 막내는 집안의 골칫덩이다. 막내는 일확천금을 노렸던 남편이 인수 예정이었던 낯선 리조트에서 홀로 머물렀던 열흘을 이야기한다. 허허벌판일 거라 짐작했던 그 산골에 정말 리조트가 있었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알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소설은 저작권료 탓에 캐럴이 흐르지 않던 크리스마스를 지나던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작가 생각에 캐럴은 행인이나 마트 손님보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싸구려 산타 모자의 정전기도 버티며 열심히 일하지만 실은 마트 소속이 아닌 마트 직원들이나, 신기루 같은 리조트와 결혼 생활을 겪은 막내 같은 이들이다.

하성란표 ‘크리스마스캐럴’에는 진짜 유령 대신 유령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서 온다. “실제 유령보다도, 언제든 자리가 비면 다른 누구로 대체될 수 있는 흔적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이 훨씬 더 유령 같다는 생각”이었다.

마지막까지 작가를 망설이게 한 것은 뜻밖에 막내가 손목에 찼던 시계 ‘까르띠에’였다. 고급시계의 대명사인 그 브랜드를 언급하면서 작가는 “내 안의 속물성이 들킬까 두려웠다”고 했다. “그 물질적인 것을 그대로 그려도 되나 하는 고민이 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게 어떤 독자들에겐 정확하게 꽂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언제나 거기 서 있는 작가가 되고 싶어

“그런 건 얼마나 해요?”라며 까르띠에를 알아본 리조트 식당의 여자도 막내처럼 여러 풍파 끝에 외진 곳에 들어와 살아가는 이라는 방증이었다. 막내가 리조트에서 잃어버린 손목시계가 있던 자리를 매만지는 장면이, 이야기의 끝 부분을 장식한다.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올해로 24년차 작가인 그에게 소설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전에는 좋은 소설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충분히 들이려고 했다”는 그는 “올여름에 ‘어떤 일’이 제게 있었고, 그 일을 겪는 동안에도 이 책의 마무리 교정을 보면서 노동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장비를 들고 나가서 미장하듯 계속 글을 쓰자고요. 욕심 부리지 않고, 작가가 거기에 서 있다는 걸 보여 줄 필요도 있다는 것을요.” 24년차 소설가의 책임감이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19-10-14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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