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바람따라 맛따라 | 거제도] 봄을 앓던 날들에게 처방전을

[길따라 바람따라 맛따라 | 거제도] 봄을 앓던 날들에게 처방전을

입력 2010-03-07 00:00
수정 2010-03-0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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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해금강, 외도, 포로수용소유적공원

기억 저편

윤성택

한 사람이 나무로 떠났지만

그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어느 날 나무가 되어 돌아온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떠난 그였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떠난 그가 남긴 유품을 새벽에 깨어

천천히 만져보는 기분,

길을 뒤돌아보면

그를 어느 나무에선가 놓친 것도 같다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살아간다는 건 온 신경을 유목한다는 것이다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머물면서

이렇게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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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으로 둘러싸인 거제도
절벽으로 둘러싸인 거제도




저녁이 쓸쓸해지는 건 익숙한 오늘이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저녁놀은 집들보다 낮게 엎드린 수평선을 가늠하기 위해 서녘을 어루만진다. 이때는 먼 곳에서 막막함을 이끌고 온 물결에도 추억이 일기 시작한다. 어디든 떠나 와 있다는 생각은 햇볕이 스미는 명왕성처럼 고즈넉하다. 나와 낯섦은 이처럼 테를 그리며 떠도는 생의 지름을 연상케 한다. 거제도는 예순 두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서로의 기슭이 되어 출렁인다. 마치 천체의 인력처럼 계절의 궤도를 같이하면서 봄을 일주하는 것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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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금강산 해금강
남해의 금강산 해금강


거제대교가 생긴 이후로 거제도는 더 이상 배멀미를 하지 않는다. 다만 휘전휘전한 시선을 다리 아래 푸르디푸른 바다에서 유추할 뿐이다. 1971년 거제대교가 완성되면서 거제도는 옥포조선소 등으로 국가산업단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후 1999년 신거제대교가 개통했고, 올해 말에는 부산과 거제도를 잇는 길이 8.2km의 거가대교도 완성된다고 한다.

해안도로를 따라 둘러보니 거제도에는 자연, 수용소, 조선소라는 세 개의 각기 다른 이미지가 하나로 겹쳐 보인다. 정체성이란 이렇듯 시간에 섞여 부유해가는 대양의 파도와 같지 않을까. 뭍을 향해 부딪쳐 오는 포말이 수없이 행로를 바위에 새기듯. 이 섬도 결국 먼 훗날 인류가 켜켜이 살다간 흔적으로 퇴적될 것이다.

옥포에서 장승포 사이, 거대한 위용의 조선소 기계들이 인간이 꿈꿀 수 있는 표정처럼 떠 있다. 붉은 대형 크레인 아래 불꽃과 쇳가루가 날리며 조립되고 있는 강철 문명. 이곳에서 완성된 배들은 바다를 순항하면서 대륙과 대륙의 경계를 닻으로 묶을 것이다. 돌아보면 볼수록 경외감 같은 고도가 직각을 이룬 채 사거리 신호등에 붉게 맺혀 있다.

거제도와 인근 섬들은 유람선의 부력으로 천혜의 연대를 보여준다. 장승포여객터미널. 주황색 구명조끼들이 제 몸에 꼭 맞는 승객을 태우면, 해금강과 외도로 향할 유람선은 행로를 되뇌며 파도를 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긴 꼬리의 물살을 풀어내며 바다와 내통하듯 뻗어간다. 물살은 유순하면서도 차고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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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 선착장 풍경
외도 선착장 풍경




첫 번째 경유지인 해금강. 원래 이곳은 섬 모양이 칡뿌리 같이 두 갈래로 흘러내려 갈도(葛島)라 칭했다. 그러나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명승지로 자리잡으면서 ‘해금강(바다의 금강산)’으로 불린다. 기암절벽을 훑던 유람선이 이내 좁은 섬 안으로 들어선다. 십자모양의 틈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어떤 계시처럼 푸르다. 간간이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철썩거리는 파도를 버티는 뱃머리는 부르르 기도 중인 양손 같다. 이 암벽 어딘가에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찾아 보낸 서불(서복)이 이곳을 지나다란 뜻이다. 불사의 꿈이 이곳에 와 궁리 끝에 바람을 핥고 싶었을까. 다만 섬은 천년의 바다를 해송에 틔워 허공을 찔러낸다.

우연히 정박하다 떠났으나 끝내 마음을 함께 데려가지 못할 때가 있다. 외도(外島)의 주인은 이러한 사연으로 전기나 전화도 들지 않는 외딴 바위섬에 일생동안 꽃과 나무를 불러들인다. 정성이 땅에 플러그를 꽂고 다이얼을 돌리는 동안 동백숲, 종려나무, 코코야자, 유칼리, 용설란들이 속속 연결되고 어느새 3천여 종의 수목과 유려한 건물이 들어선 수목원이다. 선착장에서 관람로를 따라 이어진 동백 숲길, 희귀 선인장이 있는 식물원과 조각공원 등을 한 시간만 거닐어도 드라마 ‘겨울연가’의 유진이며 준상이 된다.

외도의 카페에서 뜨거운 유자차를 손에 감고 있으면 멀리 바다 위 해를 품은 것 같다. 그 온기는 오늘 처음 절벽을 가만히 쓸어내리는 일출과도 같고, 꽃을 갈아입은 어느 식물의 고요한 탄성만 같다. 외도에 오면 슬라이드를 올리고 봄꽃들을 꾹꾹 눌러 문자메시지를 타전하고 싶을 것이다. 일상에게 이곳은 이미 외도(外道)와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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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가는 외도의 나무들
하늘로 가는 외도의 나무들


거제도는 뜻 그대로 ‘크게 사람들을 구제하는 섬(巨濟島)’이다. 한때 거제도에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 안에 17만 명의 포로들이 머물렀던 적이 있다. 막막한 전쟁에서 사생아처럼 수용되어 그 어떤 구제를 기다리다 생이 어두워졌던 포로수용소유적공원. 관람코스를 따라 잠시만 침묵을 빌려 입고 걸으면 무시무시한 1950년 어느 인생에서 눈이 떠진다. 포탄에 맞아 부서진 건물을 지나 막사와 병원이 있고, 포신을 돌리고 있는 탱크 위에는 헬리콥터들이 저공으로 스쳐간다. 그리고 산 사람이 유령이 되어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섬뜩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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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의 정원 풍경
외도의 정원 풍경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25개월 간 이곳에 머물렀던 김수영 시인은 이 수용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두가 생각하면 꿈같은 일이다. 잔등이와 젖가슴과 무르팍과 엉덩이의 네 곳에 P.W(Prisoner of War·포로라는 뜻)라는 여덟 개의 활자를 찍고 암흑의 비애를 먹으면서 살아온 것이 도무지 나라고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비교적 온화한 거제도를 2월에 여행한다는 것은 봄을 앓던 날들에게 처방전을 건네는 것과 같다. 스스로를 치유하듯 낯선 민박집 창문에 흘러내린 새벽의 습기처럼. 붉은 톨 같은 동백꽃이 숲의 혈구를 이루는 ‘학동’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거제도에 잠시 머물면서 여행이란 내가 살지 않는 공기들을 시간의 심폐로 들여 마시는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거기에서 조금만 더 우회하면 이윽고 오래 전 한 사람의 눈이 내게로 떠온다는 사실. 거제도는 지금 눈을 감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TIP

서울에서 경부ㆍ중부고속도로 통영IC로 나와 거제대교를 넘은 뒤

14번 국도를 따라 고현 신촌삼거리에서 직진하면 장승포가 나온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달리면 거제 동남쪽으로 드라이브 풍경이 좋다.

도장포에 이르면 신선대와 드라마와 각종 CF 촬영지로 유명한 ‘바람의 언덕’이 있다.

나무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널찍한 갯바위와 등대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외도는 장승포 등 6곳에서 유람선을 타고 들어간다.

아열대식물이 우거진 외도는 약 1시간 30분가량 머무는 코스가 보통이다(외도 입장료 어른 8,000원).

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거제 시청이 위치한 신현읍에 있다.

탱크전시관, 대형 디어라마관으로 들어가면 전쟁의 축소판을,

6·25 역사관에서는 전쟁의 발발과 진행과정을 볼 수 있고,

포로생활관, 포로폭동 체험관, 포로귀환열차 등 다양한 역사와 자료를 관람할 수 있다.

(포로수용소유적공원 입장료 어른 3,000원)




글·사진_ 윤성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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