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여러분의 뉴스는 안녕할까요?/김민정 시인

[문화마당] 여러분의 뉴스는 안녕할까요?/김민정 시인

입력 2017-04-19 17:56
수정 2017-04-1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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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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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넷 가운데 유독 아빠가 나를 예뻐한 이유를 자매들은 첫정이니 그로 인한 편애니 말들 많이 해 왔지만 거두절미하고 나는 이 때문이라고 보는 바이다. 그러니까 아침에는 화장실에서 볼일 보며 신문 보는 일곱 살짜리 유치원생이 나였고, 저녁에는 밥상 물리고 과일 먹어 가며 9시 뉴스 보는 여덟 살짜리 초등학생이 나였던 것. 우리 큰딸은 글쎄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신문 활자를 한 자도 안 빼고 다 읽는다니까. 우리 큰딸은 있지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부터 시청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까지 텔레비전 뉴스 한마디도 안 놓친다니까.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아빠는 물텀벙이집에서 두꺼비 소주병을 젓가락으로 뻥뻥 따가며 친구들에게 허세를 떨어 대곤 했다. 간혹 그 자리에 껴 있던 나는 부끄러움에 아빠의 손등을 꼬집고는 했다. 그때마다 아빠는 내게 귓속말로 이랬었다. 다 이 맛에 자식 키우는 거지 뭐. 근데 어디 취해서 기억들이나 하겠냐?

그래, 가게방 안쪽 농문이 화장실 문인 양 그거 열고 오줌을 싸려는 아저씨도 말린 적이 있었으니 무슨 기억들을 하겠어 그랬건만 후에 만난 아저씨들은 내게 덕담이랍시고 이런 말들을 건네고는 했다. 세상사 관심이 그리 많담서. 그래도 데모는 절대 안 된다. 네 아부지 피 토하고 죽는다. 이담에 육영수 여사 같은 영부인 되어 갖고 인천을 크게 빛내야 한다.

삼십 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이런 말들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에 남으니 어른들이여, 부디 어린이들에게 건네는 말들은 최소 다섯 번은 곱씹고 내뱉길 바라노니 그때부터 조숙한 짐승의 털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던 나는 아빠와 매일 저녁 뉴스 보기를 자기 전 양치하기처럼 습관화해 나갔다. 책 좀 읽으라면 졸기 바쁜 아빠가 뉴스만 보면 일인극을 하는 배우처럼 온몸을 던져 상황에 몰입하는 연유가 궁금도 하고 신기도 했으나,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아는 까닭에 더는 알려하지도 않았다. 해방둥이라니까, 한국전쟁을 겪었다니까, 월남을 갔다 왔다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에 우리 가족이 먹고살 수 있던 거라니까, 데모하는 대학생들 돈 대주는 게 간첩이라니까, 북한에 돈 퍼갖다 줘서 핵 만든 거라니까. 아아 힘들게 살아온 건 아는데 아빠, 우리 가족이 등 따숩고 배부르게 살 수 있었던 건 아빠가 뼛골 빠지게 일해서야, 박정희가 아빠 등골 뽑아 먹어서라고.

제 인생사를 뉴스 속에 대입시켜 한국사를 연기하는 아빠와 달리 나는 퍽이나 객관적인 위치에서 온갖 뉴스 채널을 돌려 가며 한국사를 정리하는 편인데, 그 대부분의 거리들이 실은 사건사로 점철돼 있다. 좀 많은가, 이 나라의 갖가지 사건 사고 속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좀 답답하고 억울한가, 끝끝내 그들이 왜 돌아올 수 없는지 밝혀 주지 못하는 상황들이.

어느 순간부터 내게 이 나라의 뉴스라 하면 내가 무사하여 듣게 되는 누군가의 참담한 상황으로 정의돼 버렸다. 그런데 연일 이 뉴스들 중 가짜들이 있어 속속들이 밝혀지는 중이란다. 진짜 가짜를 가려 내는 육감 적중 쇼도 아니고 설마하니 뉴스를 의심한 적 없이 살아온 아빠는 물론이고 매일같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들을 읽기 바쁜 나도 멘붕이긴 마찬가지다.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강도가 센 얘깃거리들에 현혹돼 가는 우리들, 게다가 대선이라는 크나큰 현안 앞에 일명 아무말대잔치가 벌어지기도 한 이 마당에 아빠의 휴대폰에서 삐삐 메시지 알림이 울린다. 오늘도 아빠는 오늘의 뉴스를 초등학교 동창회 밴드에서 전해 듣는 모양이다.
2017-04-2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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