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의 아침]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만든 훈장

[세종로의 아침]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만든 훈장

윤수경 기자
윤수경 기자
입력 2026-08-17 23:52
수정 2026-08-18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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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6000명 사형, 엄정 청산
반면 한국 반민특위 1년 만 와해
기록되지 않은 부역자 더 많아
역사 인식 부재, 구조 되짚어야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자행됐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새겨진 말이다.

전쟁 직후 유럽 대륙의 반민족 부역 행위자에 대한 단죄는 가혹할 만큼 엄격했다. 해방 직후 프랑스는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임시정부 주도로 대대적인 청산에 나섰다. 나치독일과 협력해 국가 반역을 주도한 최고위 정치인과 관료는 물론 말과 글로 협력한 지식인과 언론인까지 주저 없이 법정에 세웠다.

그 결과 사형 선고를 받은 이가 6000여 명에 달했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5만여 명이 ‘비국민’으로 규정돼 투표권 박탈과 재산 몰수를 당했다. 사회 주요 직종 진출은 영구히 금지됐다. 즉각적인 숙청이 일단락된 뒤에도 프랑스는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법을 제정해 끈질긴 추적을 이어 갔다. 실제로 50여 년이 지난 1998년 파리 경찰국장, 예산장관까지 지낸 80대 고위 관료 모리스 파퐁이 나치 점령기 유대인 강제 수용소 압송 문서에 서명한 사실이 드러나자 10년 형을 선고한 사례는 그들의 집념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등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수만 명의 부역자를 처벌하며 민족과 공동체를 배신한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기준을 분명히 했다.

반면 한국의 과거사 청산은 어땠는가.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출범했지만, 정권의 방해와 분열 속에 1949년 8월 사실상 와해되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최근 불거진 한 배우의 증조부 친일 논란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발단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훈장’처럼 꺼낸 가문 이야기였다. 그는 ‘4대째 의사 가문’이라며 증조부가 ‘한양에 서양식 양의원을 최초로 개원하고 고종 황제를 진료한 인물’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증조부인 안상호의 실제 행적이 드러나며 파장이 일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안상호는 이토 히로부미 추도를 위한 ‘국민대추도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고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경성부 협의회원을 지냈다. 나아가 내선융화 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그가 신문에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일본 사람과 똑같다”, “조선 사람과 상관이 없다”고 밝히며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따른 사실까지 확인됐다.

처음 “사실무근”이라던 배우의 소속사는 사료가 확인되자 하루 만에 성급했던 대응을 사과했고, 배우 역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만 알고 가족의 자랑처럼 여겨 왔다”며 고개를 숙였다. 거센 비난 속에 예능 프로그램은 다시보기 서비스를 중단했으며 그를 모델로 세우던 기업들은 광고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일부 일본 언론은 이를 두고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묻는 ‘현대판 연좌제’라며 한국 사회의 반응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의 본질은 배우 개인이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있지 않다. 핵심은 조상의 친일 이력에 대한 일말의 성찰 없이, 이를 비판 없이 미화하고 소비한 ‘역사 인식의 부재’에 있다. 거센 비난은 부끄러워해야 할 친일의 유산이 세대를 거치며 자랑스러운 명문가의 훈장으로 둔갑해 버린 상황에 대한 성토인 것이다.

국가보훈부에 등록된 공식 독립유공자가 1만 8776명인 반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은 4776명에 그친다. 엄혹했던 식민지 시절 일제에 부역한 자보다 독립운동을 한 이가 4배가량 많다는 통계는 어딘가 이상하다. 여전히 기록되지 않은 부역자가 훨씬 더 많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번 논란이 한 개인을 향한 맹목적 비난에 그쳐서는 안 된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오늘날에 미친 영향을 냉정하게 묻고 해당 가문의 후손이 “몰랐다”고 말할 수밖에 없던 그 구조를 되짚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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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경 문화체육부 기자(차장급)
윤수경 문화체육부 기자(차장급)
2026-08-18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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